어린이집 말고 어른이집은 없나요?

느슨함의 필요성

by 김단한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다들 나더러 '그만하면 뭐든지 다 알만한 나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인데, 다들 나더러 '어른'이라 한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은데 다들 나더러 '늦었다'라고 한다. 나는 이런 말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치이면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정말 '어른'인 것만 같아서, 무언가 하기에는 너무 '늦은'것 같아서.


집 근처에 유치원이 하나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유독 공터가 많아 아이들이 자주 산책을 나온다. 산책을 나온 아이들은 선생님의 통솔 하에 이리저리 흩어지기도 하고, 모래를 만지기도 하고, 낙엽을 밟고 다니기도 한다. 간혹 모이라할 때 모이지 않거나 선생님을 기함하게 만드는 행동(강아지 똥 줍기, 똥 밟기 등)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즐겁게 뛰어논다. 아무 걱정이 없는 발걸음은 가볍다. 나무껍질이 신기하고,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가 신기하고, 누군가 뱉은 침 위에 자신의 침을 뱉는 것을 즐거워한다. 어느 정도 커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사소한 일이 지금 이들에겐 하루를 차지하는 엄청난 무엇이다. 나는 그 점이 부럽다.


어린이집에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돌려 어린이집에 다시 한번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간 맞춰 간식을 먹고, 또래 친구들과 어제 본 무언가에 관하여서 이야기를 하고, 스마트폰 없이 색연필을 손에 쥐고 마구 그림을 그리고 싶다. 블록을 쌓거나, 낱말 카드를 뒤집으며 문장을 만들고 싶고 엄마 아빠에게 마음을 담은 한 줄짜리 편지를 삐뚤빼뚤 쓰고 싶다. 낮잠 시간이 오면 '이러면 안 되는데' 혹은 '진짜 30분만 자자'라는 식의 합리화로 마음 불편한 것 없이 조용한 클래식을 들으며, 주변 친구들의 새근새근 숨소리를 들으며, 집에서 가져온 좋아하는 인형을 끌어안고 잠을 자고 싶다. 어떤 꿈을 꿨는지 더듬을 새도 없이 우르르 일어나 비몽사몽인 채로 요구르트를 마시고 선생님의 손을 잡고 싶다. 시간이 되면 데리러 오는 엄마 아빠들을 구경하고 싶다. 뛰어오는 엄마, 뛰어오는 아빠를 구경하고 싶다.


엄마가 늦어도 괜찮다. 나는 남은 아이들과 함께 또 블록을 쌓을 것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블록 쌓기에 열중할 것이다. 늦은 엄마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손을 잡는다면, 괜찮다고 말해줄 것이다. 끌어안아 줄 것이다. 엄마가 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나를 두고 일을 하러 가는 것을 죄스럽다 생각하지 않도록. 나를 제때 데리러 오지 못하는 것이 엄마 때문이 아니라 일 때문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다 안다는 듯이 엄마를 보고 해맑게 웃어주고 싶다.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뒤에 남은 아이는 혼자서 블록을 쌓을 수 없을 테니.


엄마들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들이 미안해하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들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낮잠을 잤다. 자도 된다고 생각하며 잤다. 좋아하는 긴 베개를 끌어안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났을 땐 세 시간이 지나있었고 나는 개운함을 느꼈다. 죄책감 없이 잠을 잔 것은 오랜만이다. 나는 매번 최대한 늦게 자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를 괴롭힌다. 시간을 빡빡하게 써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에, 그러니까 남들이 무언가 하는 시간에 자는 것은 도태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팽팽했던 줄을 어느 정도 놓아주어도 괜찮다. 꼭 낮잠이 아니어도 괜찮다. 크게 심호흡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팽팽한 줄은 어느 정도 느슨해질 수 있다. 느슨해야 숨을 쉰다. 숨을 쉬어야 느슨해진다.


자고 일어나니 다시 무언가 하고 싶어졌다. 팽팽하기만 했던 줄이 느슨해지니 그제야 주변이 보인다. 잘 짜인 어른이집이 있다면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뭐든 잘하며 참 잘했어요 도장을 이따만큼 모았을 텐데. 스티커에 목을 매던 시기가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지금 포도송이를 그리고 있다. 알이 큼지막한 포도송이 안에는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반짝이는 스티커가 하나씩 채워질 것이다.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잘 살아냈음에 감사하며. 다 모은다면, 이것을 빌미로 나에게 커다란 선물을 해주어야지. 잘 살아낸 나에게 선물 정돈 어렵지 않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속으로만 시끄러운 수다쟁이 일지언정. 하지 못한 말이 속에 가득 쌓여있을지언정. 상처받았을지언정, 오늘도 올곧이 하루를 살아낸 나에게 나는 스티커를 수여한다. 아주 반짝이고, 아주 커다란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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