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오래 남는 세 글자
살다 보면 어떤 단어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아, 삶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바꿔놓곤 합니다.
저에게는 그런 단어가 세 개 있습니다. '결'과 '곁', 그리고 '격'입니다.
모두 자음 ‘ㄱ’으로 시작하는 이 짧은 단어들은, 살아가는 내내 마음 한켠에 단단히 새겨두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고 싶은 말입니다.
누구와 어떤 결을 맺고, 누구의 곁에 머물며, 어떤 격으로 나를 가꾸느냐에 따라 삶은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달라지더군요. 어쩌면 인생이란, 이 세 단어로 짜인 실을 하루하루 조심스럽게 엮어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 – 사람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실
처음부터 선명한 인연은 많지 않습니다. 스치듯 지나간 만남 속에서도, 어떤 관계는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야 진짜 ‘결’로 남아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제야 알게 되죠. 그 사람이 내 삶의 물살을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바꾸고 있었다는 것을. 결은 실처럼 섬세합니다. 마음을 너무 세게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엉켜버리죠. 그래서 사람 사이의 인연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천천히, 마음을 다해 묶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요즘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더욱 신중해졌습니다. 말보다 눈빛을, 속도보다 방향을 봅니다. 진심으로 맺힌 결은 쉽게 풀리지 않더군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마음 한 켠에서 조용히 살아 숨십니다.
곁 –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자리
‘곁’이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온기가 묻어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을 녹이는 말. 그걸 저는 할머니 곁에서 처음 배웠습니다. 저는 장손이었습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할머니는 저를 무조건 사랑해 주셨습니다. 잘못을 해도 꾸짖지 않으셨고, 어른들이 나무라면 조용히 제 손을 잡아주시던 분.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내 편이 되어줄 것 같은 분이셨죠. 말보다 손길이 먼저였고, 가르침보다 믿음이 앞섰던 분. 그분 곁에서 저는 사랑이란, 계산 없는 신뢰라는 걸 배웠습니다. 그 사랑은 제 안에 깊게 뿌리내려 지금도 사람을 대할 때 마음속 나침반이 되어줍니다.
어머니의 곁은 또 다른 결의 온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병을 얻으셨고, 오랜 투병 끝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든 시간을 거의 혼자 감당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지치는 일이 있을 때도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삶의 무게를 누구보다 무겁게 짊어지면서도 저와 동생에게만큼은 가벼운 웃음을 건넸던 분. 그런 곁에서 저는 책임이란 무엇인지, 사랑이 어떤 모양으로 견뎌내는지를 배웠습니다. 곁이란 결국, 내가 가장 힘들 때 떠나지 않는 사람이고, 말없이도 마음을 전해주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누군가의 곁이 되는 삶을 가장 귀한 일이라 여깁니다.
격 –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깊이
‘격’은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스며 나오는 어떤 결입니다. 그 사람의 말투, 숨 고르는 타이밍, 머무는 시선 속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것. 저는 아름다움을 보고 조용히 감탄할 줄 아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길가에 핀 풀꽃 하나, 창밖에 흔들리는 커튼 그림자, 아이의 웃음 앞에서 잠시 멈춰 설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대체로 말을 아껴도 따뜻하고, 서두르지 않아도 단단합니다. 격은 삶의 태도에서 만들어집니다. 화를 삼키는 인내, 남의 기쁨을 기꺼이 축하하는 마음,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비워낼 줄 아는 여유. 이 모든 것들이 쌓여 한 사람의 깊이가 됩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나를 지켜내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결', '곁', '격' 이 세 단어를 조용히 마음에 붙잡고 살아가려 합니다.
'결'은 가볍게 맺지 않되, 한 번 이어진 인연은 오래도록 품고 싶습니다. 서두르지 않되, 진심을 담아 한 매듭씩 정성껏 지어가고 싶습니다.
'곁'은 내가 안겨 쉬는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로 인해 마음이 놓이는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그저 옆에 있기만 해도 조금은 든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격'은 말보다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누가 보든 말든, 내가 나를 아끼는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다듬어가고 싶습니다.
결이 얽히고, 곁이 생기고, 격이 자라는 하루. 그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여 조용하지만 단단한 삶의 직조물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저는 세 글자를 마음에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