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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훈 Jan 12. 2022

우리는 왜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모든 것을 고려하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떠오르는 한 가지를 쓰고자 한다.

우리가 받는 교육은 아주 오래 전부터 도덕과 윤리, 인성 등을 강조해 왔다. 배우는 과목이 변하는 경우에도 이런 과목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오랫 동안 강조해 왔지만 우리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 삶에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장 많이 실수하고 실패하는 부분도 기술이나 기능적인 부분의 교육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도덕과 윤리, 인성이 갖추어지지 않은 판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삶은 어떤 몸부림을 치더라도 주관적이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잣대를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 삶의 아주 근본적인 도덕과 윤리, 인성 등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서야 하는데 수준 이하로 떨어질 때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왜 이런 식으로 살아야 되는가 등의 의문을 갖게 된다. 그나마 이런 의문이라도 갖는 사람은 최소한 위의 요소들을 갖춘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MZ세대와는 거리가 먼 X세대이지만 나는 항상 경쟁의 필드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하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생각하는 것들을 아주 천천히 하나씩 이루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판단이 십 년 넘는 긴 세월 동안 남들이 얘기하는 고생스러운 삶을 만든 핵심 요인일 수는 있지만 긴 시간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갱신하면서 하루 하루를 나름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니 이루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물론 아직도 풀리지 않은 가족적인 문제들과 숙제들은 해결할 수 없다기 보다는 나와 맞지 않는 가치관을 강요당하는 것이 싫어서 미루거나 외면하는 성격이 더 강하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왜 나의 삶의 만족감이 떨어지게 그런 것까지 받아들어야 하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게 더 맞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 부모는 옛날 분치고는 많이 배운 분들이지만 사람을 본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 속에서 늘 공산당이 싫고 부자들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보수정당에 꾸준히 표를 던진다. 사람이 어떤 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바는 눈으로 보지 않는다. 글을 많이 배웠지만 읽어보려고 하지 않고 삶의 미련이 없다지만 수 십 년 후에 걱정에 휩싸여 있을 때가 많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수 십 년 후의 삶에 아니라 수 십 년 후의 돈에 대한 걱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다. 삶의 불편한 모든 책임을 장남에게 지우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쁜 머리를 영리한 것처럼 굴려 남의 눈에 다 보이는 페이크를 쓰는 차남을 옹호한다.

본인들은 성과 중심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더 많은 짐을 지우고 부당함을 언급하면 귀를 틀어막고 경청불가를 외치며 족보도 없는 공정함을 주장한다. 거기에 너만 행복하면 된다는 가장 큰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 남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내 삶에서 내가 공들여 쌓아놓은 부부, 자식, 친구 등 관계의 탑을 단박에 걷어차면서도 본인의 실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인정도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그림을 계획하고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자수 작품을 울버린이 할퀴고 간 느낌을 수도 없이 자식에게 선사하면서도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많이 만든다. 하지만 사실을 모두 이야기하고 그 마지막에는 사람을 설득하는데 가장 낮은 설득의 수준인 눈물의 호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살지 않아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과다한 인정이나 마음에도 없는 칭찬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노력한 것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없는 것이다.

열심히 해서 일을 마치고 나면 돌아서기가 무섭게 더 많은 짐을 지우고 '너는 일을 빨리 잘하니까. 조금 더 할 수 있지.'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족, 직장 어디든 만연해 있다. 제일 작은 사회 단위인 가족에서부터 그런 문화가 만연해 있는 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이 어렵다. 가스라이팅, 태움, 왕따 모두 누군가를 타겟팅하고 희생양으로 삼는데에서 비롯된다. 희생양이 주변의 누구들보다 훨씬 잘 안다. 누구들이 눈에 보이는 짱구를 열심히 굴리고 있다는 것도 자신에게 좀 더 짐을 지우려고 한다는 것도 그러면서도 당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래도 성실히 열심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생기고 안타까운 결말이 오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로또, 대박같은 기대하지 못하는 일들이 아니라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해서만이라도 별 탈 없이 넘어가고 결과가 맺어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엄청난 보상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만 되면 우리는 좀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가끔 너무 열심히 달리다 지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예전 같은 큰 경쟁사회가 아닌 작은 사회가 되어가는데 모든 체제의 개편이 필요한 시기인데 덩치에 맞지 않는 옛 것을 강요하고 변화를 미루는 것은 미래를 맞이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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