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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Jan 16. 2022

하이킹을 말할 때

Red incense burner summit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받았다. 오다가다 아는 사람한테서 주워왔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 몇 권을 읽어 보았을 뿐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이 책을 읽고서야 그가 마라톤을 뛴다는 사실, 거기다 매일매일 달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전업 작가로 살기로 결심하고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을 읽었을 때, 나도 무언가를 꾸준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갑자기 샘솟았는데 그때 생각난 것이 하이킹이었다.


 내가 홍콩 하이킹에 맛들이기 시작했던 건 2017년 즈음해서였던 것 같다. 한 달에 3~4번씩 홍콩에 왔었는데, LKF파티와 야시장 쇼핑에 슬슬 지겨워질 무렵(약 2년간 나름 구석구석 홍콩을 훑었다.), 여행책자에 나온 Dragon's back에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됐다. 물론 처음에는 홍콩에서 웬 하이킹인가 싶었지만, 뷰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하이킹 코스 몇 군데를 다녀온 이후엔 하이킹이야말로 홍콩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내 인생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여차저차 2018년부터 두 번 연달아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더니, 하이킹 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코로나가 퍼지며 피트니스 센터나 댄스 클래스에 갈 수가 없게 되니 모두들 산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던 시기에도 주말에 산에 가면 등산객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계단을 올라야 할 정도였다. 그 덕에 나도 남편도 무시로 하이킹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허락된 야외활동에 나름 잘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하이킹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루키의 달리기처럼 매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기 둘을 집에 두고 산에 오르는 것은 지금의 나에겐 무리다. 꾸준히 매일 하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는 알겠지만, 다가가지 못할 목표를 정해놓고 금방 시들해지거나 실망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기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빈도로 소소하게나마 자존감을 보호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매일 달리는 것에 비하면 목표라고 말하기 조차 민망한 목표를 세우고 Red incense burner summit(Hung Heung Lo Fung: 紅香爐峰)에 다녀왔다.



 Red incense burner summit은 홍콩섬에 있는 하이킹 루트 중에 쉬운 편임에도 그 끝에 보이는 뷰가 정말 멋지다. 계단길과 숲길의 비율이 적당히 섞여 있고 나무 그늘도 충분하다. 거기다 Quarry bay에서 Braemar hill로 올라갔다가 Red incense burner summit으로 가는 루트를 선택하면 중간에 바위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미니 계곡에서 잠시 쉴 수도 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오르던 산이 이런 비슷한 바위길이어서 그런지 나는 하이킹을 갔다가 바위길이나 계곡, 작은 폭포 등을 발견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잘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아직까진 시간 적으로 여유롭게 하이킹을 갈 상황은 아니다 보니 산 위 넓적한 바위 위에서 햇빛을 받는 꿀 낮잠은 나중을 위한 소망으로 남겨두어야 하지만 말이다.


 산을 오르며 수많은 사람을 마주쳤다. 힘차게 달리는 송아지만 한 개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는 여린 몸의 아주머니, 홍콩식 뽕짝 같은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카세트를 허리춤에 매달고 거의 뛰다시피 산을 오르는 강철체력 할아버지, 안아달라고 보채는 손주를 잠깐씩 안고 내려놓길 반복하며 천천히 걷는 할머니, 스키장에서나 쓸법한 시커먼 고글을 쓰고 달리는 금발의 외국인. 어느 산에 가든 비슷한 이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전에 봤던 그 사람을 또 마주쳤나 궁금해지다가도 아마 여기 사는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살기 때문이겠거니 하는 결론을 내린다.


 산에 오르는 동안 나에 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이 참 적은 것 같다. 내 일상, 내 주변, 내 일, 앞으로의 계획, 쓰다만 글의 스토리 전개 등 약 3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면 생각할 거리는 참 많은데, 막상 산에 가서는 거기서 보게 되는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식물과 동물을 관찰하는 데에 시간을 쓴다. 오늘 오른 곳에는 특히나 새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예쁜 새 구경을 하다 시간을 다 보냈다. 자기들끼리 서로 불러가며 푸드덕 거리는 것을 보니 아기들이 시끌시끌하게 노닥거리는 모습 같았다. 비둘기나 참새 밖에 보지 못한 나로서는 꽁지깃이 긴 새나 얼굴에 주황색 점이 있는 새를 보는 것이 조류 사파리라도 하는 양 신기하다. 이 조그마한 도시 홍콩에서 이렇게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스포츠 용품 광고라도 찍을 기세로 씩씩하게 바위를 타고 올라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다. 360도 빙 둘러서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둘러보는데, 매번 본 광경이지만서도 탄성이 그치질 않는다. 그래, 이게 홍콩이지!



 전면이 트여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산이 아름다웠고, 바위가 아름다웠고, 하늘이 아름다웠으며 홍콩이 아름다웠다. 꼭대기의 바위엔 이미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해넘이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사진가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홍콩에서 가장 멋진 해넘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나도 몇 시간만 더 앉아서 사색을 즐기면, 불타오르는 노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집에 가서 아기들 저녁밥을 해줘야 하니 아쉬움을 가득 안고 하릴없이 산을 내려왔다.


오늘 하이킹의 루트


 산을 내려오면서 하루키의 책이 또 생각났다. 그는 소설 쓰는 것의 많은 방법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웠다고 했다. 그가 달리기를 대하는 것과 글쓰기를 대하는 것을 보면 30년 이상 매일 달리기를 한 그의 전념, 몰입이 그의 창작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두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글쓰기뿐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잠시 쉬어가고 싶을 때마다 기억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던 구절이 떠올랐다. 비록 매일은 아니더라도, 내가 세운 목표대로 산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 세월이 흘러 내가 전념하던 무언가를 되돌아봤을 때 나름 지혜가 가득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날이 오겠지. <하이킹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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