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되찾고 싶어

by 달숲

나만의 방을 구해 놓고 그곳에 가 있으면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서는 나를 돌아보고 싶어도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가 돌봐야 하는 아이들, 돌봐야 하는 살림과 환자인 남편, 수시로 전화를 걸어 내게 의지하는 부모. 다른 사람을 돌보느라 정작 나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나를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나는 오로지 자신으로만 존재하고 싶어 하던 <19호실로 가다>의 주인공 수전처럼 매일 나만의 방으로 갔다. 그 방에서 나는 내가 잊고 있던 나를 기억해내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나의 당연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엄마가 나를 낳은 지 1년 6개월 만에 남동생을 또 낳아 나의 양육은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맡게 되었다. 어렸을 때 기억은 잘 나질 않는데 일곱 살 어느 날 아침에 할머니와 둘이 마을 입구에 나가서 시린 손 끝을 호호 불어가며 유치원 버스를 기다렸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아빠는 리비아로 돈을 벌러 나가 삼 년 정도 집을 비우기도 했고 원래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유년기 아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때 엄마는 아빠가 보내오는 돈을 이모와 고모에게 계를 들어 맡겼는데, 그게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아빠가 돌아온 후로 엄마와 매일같이 싸워서 집이 전쟁통 같았다. 집을 나가네 마네, 이혼하네 마네, 죽네 마네, 고성이 오가다가 할머니가 말려야 겨우 싸움이 끝이 났고 아빠가 집을 나가고 나면 엄마의 긴 울음이 이어졌다. 엄마를 위로하고 달랠 사람은 우리 남매밖에 없었다. 울고 있는 엄마에게 가서 신세한탄을 한참 듣다가 공부 열심히 하고 성공해서 엄마를 호강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수없이 했다. 가정불화는 우리가 자라는 내내 이어졌다. 엄마는 자신이 죽으면 네가 동생의 부모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나를 불안하게 했고, 나는 그때마다 내가 더 잘하겠다고 다짐을 하며 엄마를 살려내야 했다. 남동생과 나는 할머니 방에 모로 누워서 엄마가 집을 나가거나 죽을까 봐 두려워하며 울다 잠이 들었다.


할머니가 싸주는 도시락통을 들고 학교를 가고, 할머니가 정리해 준 방에서 함께 잠을 자며 자랐다. 하지만 집 밖을 나서면 연세가 많고 한글을 모르시는 할머니의 안내자 역할이 자연스럽게 내게 맡겨졌다. 외출할 때는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한글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초등학교 때 이미 여든 살 넘으셨던 할머니는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계셨다. 주기적으로 약을 타러 약국을 다니셨는데,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약국에 할머니를 모시고 가려면 30분 이상이 걸렸다. 흰 고무신을 신고 종종걸음으로 나와 걷는 속도를 맞추시다가 이내 숨을 헐떡이시며 잠깐 쉬었다가 가자고 하셨다. 차도와 인도 구분이 없는 좁은 비포장길에서 제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거나 길가에 있는 바위에 앉아서 쉬곤 하셨는데 주변 공장에서 갑자기 차가 오지는 않는지 주위를 살피느라 마음이 늘 조마조마했다. 목욕탕도 성당도 항상 할머니와 함께 다녔다. 목욕탕에 가서 가격표를 읽어드리고 여탕 입구를 찾는 일부터 세숫대야를 가져다 드리는 잔심부름까지 늘 할머니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드리곤 했다. 어릴 때부터 혼자 알아서 해오던 일이 많았기에, 머리는 어떻게 감아야 하는지 때는 어떻게 밀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운 바가 없었다. 엄마는 신경이 예민하고 자주 아팠고, 할머니는 그런 엄마의 눈치를 보며 엄마 신경 쓰지 않게 처신 잘하라고 나를 가르쳤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속옷을 갈아입는데 오른쪽 사타구니 아래로 살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탁구공처럼 동그랗게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면 말랑말랑한 물풍선처럼 쏙 들어갔다가 이내 다시 나왔다. 아프지 않았기에 무섭지는 않았다. 서 있으면 볼록 튀어나오고 누우면 다시 말끔하게 들어갔다. 목욕탕에서 할머니에게 보여드리니 아프지는 않냐 확인을 하신 후 엄마가 알면 걱정할 테니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거의 일 년 동안 그 물풍선을 혼자 숨겨놓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조몰락대며 지냈다. 일 년이 지나도 내 몸에서 그 물풍선이 사라지지 않자 할머니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셨고,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에게 걱정거리를 안긴 것 같아서 엄마의 미간 주름을 따라서 내 마음도 쪼그라들었다. 내가 3학년이 된 여름에 누군가의 문병을 갈 일이 있던 엄마는 나를 데리고 대학병원에 갔다. 병원에 간 김에 내 사타구니를 간호사에게 보여주며 진료과를 문의했다. 진료를 본 의사는 왜 이제야 병원을 왔느냐고 야단을 친 후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엄마는 당황하며 지금은 입원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다음에 입원하면 안 되냐고 했다. 의사는 이미 탈장이 오래되어 장이 썩었을지도 모르는데 심각성을 모르고 어디를 가냐고 호통을 치며 다음 날 아침 첫 수술로 일정을 잡았다.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기억하는 건 인생 첫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던 그 일주일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전신마취 개복 수술을 하고 병원에서 지내며 엄마의 돌봄을 받던 그 기간이 내 유년의 기억 중 가장 따뜻했던 일주일이었다.


나보다 타인의 기분이나 컨디션을 살피고 돌보며 살아온 사람은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른다. 모든 주파수가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맞춰져 버리는 것이다. 중학교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자주 가위에 눌리는 엄마를 위해 방문을 열어놓고, 귀도 열어놓고 잠을 잤다. 일하러 나가 주말에만 잠깐 집에 오던 아빠를 대신해서, 엄마의 신음소리가 들리면 달려가 엄마를 깨워야 했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에 최대한 빨리 달려가 엄마를 흔들어 깨워도, 엄마는 왜 이제 왔냐고,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는데 듣지 못했냐고 원망하며 울었다. 나는 늘 엄마가 불쌍했고, 제대로 지켜줄 수 없어서 무력감에 시달렸다. 엄마는 언제나 더 완벽한 돌봄을 원했지만, 나야말로 그런 엄마에게 돌봄과 사랑을 받고 자랐어야 할 아이였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너무나 벗어나고 싶었다.


스무 살이 되고 나는 지방대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다.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하며 시 쓰기에 빠져들었던 그 시간이 어쩌면 내가 가장 나답게 살았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 있을 수 있던 시간. 춘천에서 보냈던 그 2년의 시간을 너무 사랑했다. 가끔씩 집에 들를 때마다 이내 나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주파수가 다시 바뀌었다. 집과의 거리를 지켜가며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애썼다. 그러다가 더 좋은 글을 쓰고 싶고,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입시를 다시 치르고 염원하던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자취 생활을 정리하고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오히려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주식에 빠진 아빠가 집 담보대출까지 받아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학비는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당장 생활비가 없었다. 학교도서관 근로장학생, 식당 서빙, 학원 강사, 전단지 알바 등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언젠가는 다 글쓰기의 재료가 되겠지 생각하며 위안했지만 정작 삶은 글쓰기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왕복 5시간 거리의 학교를 다니면서 수업 외의 모든 시간은 돈을 버는 데에 써야 했으니 글 쓸 체력도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생활비를 벌어가며 꾸역꾸역 학교를 다니면서 학업보다는 취업 준비에 골몰하다가 졸업 후 곧바로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주어진 환경에 나를 맞추고 내 존재를 지우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제대로 사랑을 받으면 내가 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할 때조차도 쉽게 나를 잃어버렸다. 아니 내가 사랑할수록 더 쉽게 상대에게 맞춰졌다. 자유분방하고 당당하던 나를 사랑했던 상대도 자신에게 맞춰주는 나에게 이내 길들여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타인을 깊이 사랑할수록 나는 사라져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야 했다. 내가 집에서 뛰쳐나와 나만의 방을 구한 이유였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에서 나에게 주파수를 맞추고 집중하는 법을 익히고 싶었다. 내가 만든 고치 속에서 내가 더 단단해질 때까지. 내가 잊은 나를 기억해 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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