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졌으면 쉬어 가야지

by 달숲

교통사고가 나면 한방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는 것이 좋다는 주변인들의 권유에 따라 인근 한방병원에 입원을 했다. 의사의 간단한 문진 후에 추나치료와 물리치료 등을 받았다. 사고 직후부터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는데 저녁이 되자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경미한 뇌진탕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두통이 3일 동안 지속되었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열이 나더니 급기야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앉기도 눕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mri 촬영 결과 척추 디스크가 6개나 돌출되어 있었다.


뇌진탕 증상은 며칠 시간이 지나자 사라졌지만 극심한 허리 통증은 입원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일시적 근육통 이외에는 큰 이상이 없어 2주 만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나였다. 허리 통증으로 앉거나 구부리는 자세가 힘드니 일상생활이 어려웠고 거기에 마음의 병도 생기고 말았다. 불안증이 심해져서 수면장애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엄마 껌딱지인 둘째 아이를 떨어트려 두고 혼자 병원에 더 입원해 있을 수가 없어서 함께 퇴원을 했다. 2주 만에 돌아온 집은 너무 낯설었다. 집에 돌아왔다는 편안함이나 안정감보다는 이제 당장 어떻게 직접 밥을 지어먹고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돌보지 하는 막막함이 밀려왔다. 집에서조차 거동이 쉽지가 않아서 거의 누워 있다시피 했고 밤에 깊이 잠들지 못하니 불안증은 더 심해졌다.


선잠에서 깰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며, 용달차가 덮쳐 다 깨져버린 뒷유리창을 바라보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아이는 하늘의 도움으로 털 끝 하나 다친 데 없이 카시트 안에서 너무나 멀쩡했지만,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에 이미 나는 엄청난 공포와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잔잔한 일상에 언제든 갑자기 재앙이 덮칠 수 있다는 공포, 그렇게 내 아이나 가족을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이유 없는 두려움에 시달렸고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곤 했다. 깨고 나서 아이들을 확인하고 어루만지면서도 한번 발동한 불안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 등하교와 살림은 남편의 몫이 되었다. 통원 치료를 위해 차를 타는 것도 무서워서 집 앞 한의원으로 병원을 옮겼는데, 인도를 걸을 때에도 차도 가까이에는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호였다. 내 안의 우울이 나를 잡아먹고 있다는 신호. 나는 그 녀석을 잘 알고 있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이 말기신부전 진단을 받았을 때, 칼륨 수치가 너무 높아져 몇 차례 고비가 있었다. 그때 나는 남편의 심장이 멎을까 봐 너무 무서웠고 심리학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불안을 달랬다. 그러면서도 불안과 우울이 뒤엉켜 올라오는 날은 어쩔 줄 몰라하며 혼자 울곤 했다. 그때 마침 전화를 걸었던 친구가 종로에 있는 신경정신과를 권해줬었다.


“너는 지금 도움이 필요해. 제발 병원에 가.”


그때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내 마음을 다루는 건 내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투석을 시작한 남편과 매일 아침저녁으로 티타임을 가지며 나의 마음뿐 아니라 남편의 마음까지도 함께 돌봤다. 코로나가 터진 후로 매일 온 집안을 락스로 소독하며 무균실처럼 관리했지만 남편의 불안이 심해지고 더 이상 내가 케어하기 힘든 상황이 되자 번아웃이 왔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돌봐야 하니 억지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사건을 계기로 버티고 버티던 둑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나는 무기력과 우울에 잠식되었다. 구토와 두통에 시달리다가 식욕이 사라졌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으며 침대에 누운 채로 꼼짝도 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고 눈을 감을 때마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터에 나갔던 남편이 점심시간에 잠깐 집에 들러 아이들 밥을 차려주거나 가까운 곳에 살던 엄마가 와서 살림을 해주며 아이들을 챙겨줬다. 둘째 아이가 네 살 때 일이다. 중학생 아들은 온라인 수업과 게임을 하느라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둘째 아이는 신기하리만치 한 번도 놀아달라고 보채거나 징징대지 않고 거실에서만 놀았다. 엄마의 상황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온순하게.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안방에 들어와 누워 있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며 말했다.


“엄마 많이 아프지? 코 자. 그럼 다 나을 거야.”


다시 눈물이 터졌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내 인생의 신파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이 아이들을 책임지고 잘 길러내야 한다. 그때 나는 가슴속에 들끓는 분노를 어떻게 하지 못해, 내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생각을 멈추게 해야 했다. 그때 친구가 권해줬던 신경정신과 생각이 났다. 종로에 있다고 했으니 바람도 쐴 겸 나들이하듯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았다. 전화로 미리 예약을 해두고, 몇 시간 일찍 가서 근처 고궁을 걸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기와 햇살이었다. 고궁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바람을 느끼는데 다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이를 생각하며 여기까지 나오긴 했는데 나는 여전히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보면서 그때가 떠올랐다. 그때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아오다가 경과가 좋아져 약을 끊고 병원을 다니지 않은 지 1년 만이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지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가까운 곳의 신경정신과를 방문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진단받았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로 점차 정상적인 수면이 가능해지고, 상담이 진행되면서 과도하게 올라와 있던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상담으로 명상과 호흡, 차도 근처에서 안전하게 머물러 보는 훈련,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타서 불안 다스리기 등을 시도하며 점차 일상생활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아이들 등하교를 맡고 있는 남편에게 살림까지 다 맡겨둘 수만은 없어서 식당에서 신발을 정리할 때 쓰는 집게를 주문했다.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바닥에 있는 물건(아이가 아무렇게나 벗어둔 양말 등)을 집어서 정리할 수 있어서 매우 유용했다. 매일 집 앞 한의원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집에 와서 잠시 누워서 쉬다가 일어나 집게를 들고 집안을 걸었다. 앉으면 허리 통증이 극심해져서 대부분의 시간을 눕거나 서서 보냈다. 책도 서서 읽었고, 노트북 작업도 서서 했다.


당시 나는 ‘김현희자수보자기연구회’에 소속되어 있는 회원으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단체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앉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기에 장시간 앉아서 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번 전시는 빠지겠다고 연구회에 알리고 치료와 일상 회복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남편의 투병과 육아로 공방 문을 닫았을 때에도, 코로나로 집에 갇혀 생활하며 두 아이들의 삼시세끼 집밥을 차려주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바늘이었다. 아니, 오히려 자수 작업만이 내 존재 의미를 잃지 않게 해 준다는 듯이 육아와 살림 사이에서 어렵게 시간을 내며 더 집요하게 매달렸었다.


매일 그날의 일과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을 떠올리고 그 장면에서 색을 추출했다. 그렇게 정해진 그날의 색으로 작은 꽃을 하나씩 수놓던 날들이었다. 수놓은 꽃들을 조각조각 이서 커다란 조각보를 만들어갔다. 그 당시 내 삶을 누군가 본다면 매일 아이를 돌보고 살림만 하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이 찾아오는 지루한 인생 같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작품은 그 시간들의 증거가 되어 주었다. 그 모든 날들이 다 다른 색으로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고, 그 모든 일상 속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행복의 순간을 색실로 기록하는 사람이 나였다고 자수조각보가 대신 말해주었다.


그렇게 내가 매달렸던 바늘을 이번엔 놓기로 한 것이다. 건강 앞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시 우울에 빠질까 봐 걱정도 됐지만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는 신경정신과의 도움을 받으며 건강과 마음 관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사고 이전부터 이미 두 갈래의 길을 만난다면 이번에는 다른 길을 걸어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고가 오히려 하나의 길을 포기하는 나의 죄책감을 덜어줬을지도.


엎어졌으면 쉬어가야 하는데, 엎어져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또 나다. 무언가에 빠져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듯이. 나는 자꾸 현실을 잊고 빠져들 대상을 찾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는데, 이제 자수 작업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누워서 환투자나 열심히 하자 싶었다. 지난 몇 년 간 스마트스토어와 투자 공부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커진 나에게 누워서도 핸드폰만 들면 할 수 있는 환투자는 최적의 일이었다. 때마침 교통사고 직전에 만났던 크루들이 있지 않은가. 그동안 환투자 크루들과의 톡방은 눈팅만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퇴원 후 일상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을 때부터 다시 투자를 적극적으로 시작해 나갔다. 새로운 길을 걷는 사람답게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서. 불안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내가 부여잡은 새 밧줄이었다. 지금 내게는 이 줄밖에 없었다. 그러니 온 힘을 다해 매달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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