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 같은 방에서 나와

by 달숲

방학이 되면 엄마의 일과표는 완전히 아이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띠리리리. 8시 알람소리에 번쩍 눈이 떠진다.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어서 일어나. 어젯밤 늦게까지 놀다 잠이 든 둘째 아이는 내 옆에서 아직 곤히 자고 있다.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옷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왔다. 어제도 새벽 2시가 넘도록 거실에서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하던 아들의 방 문도 아직 꼭 닫혀 있다. 고 3 때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을 만난 아들은 이제 입시를 마치고 친구들과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방학을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둘 다 정오가 다 될 때까지 늦잠을 잘 것이다. 아이들이 깨기 전에 작업실에 다녀오려고 주섬주섬 차 키와 가방을 챙겨서 집을 나선다. 두세 시간만이라도 집중해서 작업을 해보자. 글쓰기든 유튜브 편집 일이든. 방학 기간에 내 시간을 만들기 어려워서 새로 시도해 보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틈에 작업실 다녀오기. 몰입에 들어가기까지 한참의 예열 시간이 필요한 다른 공간에 비해 작업실은 들어서자마자 집중도가 확 올라가서 짧은 시간 효율적으로 몰입해서 일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첫째 아이는 고등학교 1, 2학년 동안 자기 방 안에서 애벌레처럼 지냈다. 학교에 다녀와서도, 주말에도, 방문은 늘 닫혀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나는 아이가 그 안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가늠해보곤 했다. 집에 들어올 때 표정이 어둡거나 한숨 소리가 방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날이면 걱정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아들이 좋아하는 제육볶음이나 닭볶음탕 같은 요리로 저녁을 준비해주고는 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 먹는 일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던 아이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로 진로 문제도, 친구 관계도 모든 것이 뜻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 눈치였다.


고 1이었던 아들이 곧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집에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간 아이는 그날 방 안에서 이불을 뒤쓰고 엉엉 소리 나게 울었다. 이사를 온 낯선 동네에서 새로 입학한 학교를 다닌 지 몇 달 안 되었던 시기였다. 그날 이후로 아들은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졌고, 어느 날 아침에 아들을 깨우러 들어갔다가 손등에 그어진 수십 개가 넘는 붉은 선들을 보게 되었다. 예리한 칼날로 살짝씩 손등을 그은 듯한 흔적.

설마.

심장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자해라니.

내향적인 성격이었지만 마음이 올곧고 밝은 아이였다. 자는 아들을 깨워 이게 뭐냐고, 네가 그런 거냐고 물었다. 아들은 엄마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피식 웃듯 말했다.

“별 거 아니야.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심각한 거 아니야. 그냥 한번 해본 거야.”

“손등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심각한 게 아니라고?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

아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다시 나를 문 밖으로 내몰고 문을 닫아버릴 기세였다.

“장난으로 해본 거라니까. 오버하지 마.”

“알겠어. 근데 남들이 보면 널 이상한 아이 취급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다시는 이러지 마. 알았지?”

아들은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나는 아들의 손등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손등에 그어진 상처를 따라 내 마음이 예리한 칼날에 베이는 느낌이었다.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아이 말을 그대로 믿고 넘어가는 척했다. 하지만 이미 마른 흙으로 쌓은 제방 같은 내 마음은 슬픔의 파도가 덮쳐 한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뒤로 나의 모든 신경은 아들에게 가 있었다. 아니 처음 아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한 번도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임신 8개월 만에 미숙아로 태어나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갈 때부터, 모든 성장 발달의 시기마다 크고 작은 돌부리에 늘 발이 걸리며 쉽지 않게 오늘에 이르렀던 아이였다. 고등학교 시기도 역시 이렇게 순탄치 않게 걸어가는구나 싶었다. 아들이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말하며 방문을 닫아버리던 그날처럼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까 봐 두려웠다. 문밖에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보지 못하고, 닫힌 문 안에서 홀로 힘들어할까 봐. 교우 관계는 아이가 스스로 헤쳐가야 할 문제이긴 했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 괴로움 속에 갇혀 살지는 않기를 바랐다.


고1 학교 상담 주간이 돌아왔다. 다들 학업에 관련한 입시 상담을 하는데, 나는 담임 선생님께 아이의 교우 관계와 학교 생활에 대해서만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장애인 이동권 집회를 주제로 토론 수업을 할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셨다. 장애인 혐오 발언을 하는 대다수 아이들 사이에서 아들만 장애인들 편에 서서 그들의 시위를 옹호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들의 반듯한 성정과 가치관이 지금의 반 아이들과는 맞지 않아서 진정한 친구를 만나려면 대학에 가서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아들 또래 아이들은 중학교 시절을 코로나로 집에서만 보냈었다. 중학생 시절에 겪었어야 할 중2병 격동기를 지금에서야 몰아서 겪느라고 학교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 특히 지금 반에 유난히 그런 아이들이 몰려 있어서 분위기가 더 좋지 않다고. 그 무리의 아이들과 아들이 각을 세우고 있는 눈치였다. 선생님은 반 분위기가 더 흐트러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아들이 심적으로 많이 의지가 된다는 말씀도 하셨다. 아들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내가 아이를 믿고 지지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아이는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했는데 저녁 급식이 나오지 않아서 식사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함께 저녁 먹을 친구가 없는 듯했다. 고민하지 말고 학교 바로 코앞인 집으로 오라고 했다. 저녁밥 맛있게 해 줄 테니 먹고 쉬다가 가라고. 내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것은 따뜻한 밥을 짓고 좋아하는 요리를 해서 속을 든든하게 채워 주는 것뿐이었다. 아이는 학교 생활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 자신이 알아서 잘 지낼 테니 묻지 말아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더 이상은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네 편이 여기에 있다. 언제라도 엄마에게 와서 쉬고 힘을 얻어가라고 말로 하는 대신 그렇게 집밥을 지어 먹이며 곁에 있었다. 좋은 친구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에 가서야 만나게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우리 가족끼리 맛있는 음식 먹고 추억 쌓으면서 행복하게 지내면 된다고. 네가 좋은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될 거라고 주문 같은 응원을 수시로 해줬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남편과 나는 밤마다, 친구가 없어도 따뜻한 부모가 있는 아이는 절대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불안을 다독였다. 남극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를 의지하며 똘똘 뭉친 황제펭귄들처럼.


겨울방학의 달콤한 늦잠에 빠져 있는 두 아이를 놓고 혼자 집을 나서는 아침. 맛있는 요리 냄새를 풍기고 압력밥솥 추 돌아가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아들이 스스로 방문을 열고 나오길 기다리던 수없이 많은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치 속에 들어가 있는 애벌레 같던 아들이 무사히 나비가 되어 나올 때까지 곁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하던 날들. 그 아이에게 또 하나의 안전한 고치가 되어주길 바라며 저녁마다 내어줬던 내 작업실. 그곳에서 무사히 자라 스무 살이 된 아들은 이제 날개를 펼치려 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그곳에서 새로운 도약을 꿈꿀 차례다. 아들을 품어 세상 밖으로 내보낼 준비를 하던 날들처럼, 내가 나를 안아주는 마음으로.


나의 고치가 되어줄 내 작업실, 자기만의 방으로 향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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