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고 싶지 않은 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테라스 위에는 천막이 있었지만 가장자리 쪽에 앉은 탓에 이따금씩 그녀에게 물줄기가 튀었다.
T는 물이 덜 튀는 안쪽 자리로 이동하자고 권했다. 그녀는 물이 튀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그를 거슬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몇 분 뒤 빗줄기가 점점 힘이 있어지자 그녀는 자리를 옮기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전 날의 숙취 때문에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가 저녁에서야 먹는 첫 끼였지만,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그녀는 또 와인을 홀짝홀짝 마셔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평화롭고 차분했다. 다른 테이블에서 대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지만 그곳은 샌디에이고 한복판, 대화소리 또한 영어였기 때문에 그녀의 주의를 그다지 끌지 않았다. 오히려 집중을 잘하게 해주는 백색소음처럼 느껴졌다.
그 백색소음 위에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투둑투둑 하고 들렸다. 이따금 번개도 쳤다. 비가 오지만 습하지 않았고, 상쾌한 미풍이 불었다.
어느새 어색한 감정이 잊히고 그녀도 모르게 완벽한 온도와 바람과 빗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마침 T가 '지금 빗소리에 적당한 바람이 부니까 참 좋네'라고 말했다. 그제야 그녀는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러네'라고 대답하자 번개가 쳤다.
T는 그녀에게 번개 치는 걸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T는 조금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자기는 번개가 좋다고 했다. 그녀 또한 의외라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왜냐고 물었다.
T가 대답했다. 크게 번개가 치면 그게 초자연적인 힘처럼 느껴진다고.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 아래서 누구든 한낱 인간, 자기와 똑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자기를 얽매던 관계나 사건, 힘의 불균형에서 벗어나 그저 평온하게 느껴진다고.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났다. 정확하게 똑같은 이유로 그녀는 번개를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그녀를 늘 우울하고 무섭게 만들었다.
'이것 봐.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야.' 그녀는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