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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s Nov 14. 2022

어느 날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길랑바레/밀러피셔 증후군 #1


+ D1 일요일

오랜만에 약속이 없는 주말이었다. 왠지 혼자서 이것저것 하고 싶었던 것을 도장 깨고 싶은 그런 주말이었다. 이번 주말 날씨 온도가 22도로 훅 떨어졌다. 이미 30도 이상의 날씨에 적응한 나의 신체는 택배를 픽업하러 잠시 로비로 나갔다가 바깥공기에 깜짝 놀라 오들오들 떨었다.

오늘은 숙원 과제였던 골프채 구매를 꼭 끝내야지. 

나는 의외로 쇼핑에 스트레스받는 편이다. 비싼 물건을 척척 잘 사는 그런 타입도 아니다. 코치에게 빌린 연습채로 레슨을 이어갔지만 빨리 구매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가슴 한편에 있었다. 풀세트 백여만 원짜리로 아무 브랜드나 사기로 쉽게 맘먹고 나섰던 쇼핑 여정은, 그런 싸구려 채를 사면 결국 조금 있다가 다시 사야 하니 처음부터 아이언, 드라이버, 퍼터, 가방 다 따로따로 제대로 된 걸 사야 한다며 극구 말린 친오빠와 아는 언니 K 덕분에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여차저차 미션을 성공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저녁 8시에 맞춰둔 테니스 트라이얼 레슨을 취소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 쇼핑을 하다가 너무 지쳤나, 왠지 저녁에 매우 피곤할 느낌이야..

집으로 돌아온 나는 뜨끈한 배추 삼겹 찜을 요리해 먹으며 몸을 노곤 노곤 녹였다.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레슨을 취소하길 참 잘했네, 오늘 KBBQ를 먹으러 가자던 N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참 잘했네..


+ D2 월요일

직장인의 날이 밝았다. Thank god, 오늘 재택근무인 것이 천만다행이다. 감기에 걸렸다는 걸 확신했다. 재택이기 때문에 병가를 내지 않아도 매니지 할 수 있겠지라고 자신했지만 생각보다 독한 감기였다.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흘렀다. 열이 나는 느낌도 있었지만 막상 체온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ATK 테스트는 두 번이나 음성이 떴다. 혼신의 힘으로 버티다 간신히 마지막 미팅을 마친 나는 침대로 스르르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자기 전 내일 만나기로 한 O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O, 미안한데 몸이 안 좋아서 내일 못 만날 것 같아. 다시 연락할게.

첫 만남부터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사람이 흔치는 않다. 그런데 그게 이성으로서 라면 더더욱 특별한 일이다. 얼마 전 데이트를 시작한 O는 그런 내게 아주 빠르게 마음의 장벽을 허물게 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일말의 파워게임은 없었고, 포장도 필요하지 않았다. 지난 번 긴 데이트 후 헤어질 때 그는 내게 We should meet more often이라고 말했다. 내가 쳐다보자 그는 if you want이라고 덧붙였다.


+ D3 화요일

컨디션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ATK는 여전히 음성이었고, 중요한 오프라인 회의가 있어서 회사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의지 불태우며 회사에 갔다. 아침에 해열제를 먹고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두통과 열감이 심했다. 팀원 P에게 혹시 해열제가 있는지 물었다. P는 본인 차에 있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오분 뒤 내 자리로 찾아온 P의 손에는 편의점 냉장고에서 갓 꺼내온 듯한 차가운 대추 음료와 타이레놀이 들려있었다. 방금 사 온 것이 분명했다. 마음 한편이 따뜻했고 참 고마웠다. 커리어만 보고 타지에 홀로 있는 내게는 이런 작은 인간적 관심과 사랑이 더 크게 다가오곤 한다.

대추음료를 까서 타이레놀을 꿀꺽 삼킨 나는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음료를 삼키자마자 입안 전체가 따끔거렸다. 당황스러워하는 동안 혓바늘이 돋으며 혀가 붓는 느낌도 들었다. 혀가 부으니 호흡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란 나는 바로 병원에 찾아갔다. 다행히 혀가 부은 느낌은 금방 가라앉았고, 병원에서도 일반 감기 처방 외에는 별다른 진단을 하지는 않았다.



+ D4 수요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침대에서 쇼핑앱을 뒤적거렸다. 어두운 곳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눈이 부시고, 스크린이 번져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폰을 든 채로 잠들어 몇 시간이나 잤을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이상했다. 모든 물체가 좌, 우 두 개로 보였다. 사진을 겹쳐 놓은 것처럼... 술이 잔뜩 취한 사람처럼 어지럽기도 했다.

내가 왜 이러지.. 아주 피곤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나?

일단 연차를 내어 놓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휴식을 취하면 다시 돌아오겠지.. 어젯밤에 잠을 많이 못 잔 탓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점심이 되어도 이 복시 증상은 여전했다. 증상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어제 나를 진료 보았던 의사 선생님은, 이건 흔한 증상이 아니라며 당장 신경과로 가보라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신경과 의사는 무서운 이야기부터 꺼내고 봤다. 중추신경의 이상일 가능성이 있으니 내일 뇌 MRI를 찍어보자고.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피곤해서 잠시 나타난 증상일 수 있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모든 것이 하나로 보일 거야.

라고 희망하며 잠을 청했다.


+ D5 목요일

새벽 여섯 시 반쯤 눈이 떠진 나는 불을 켜고 확인부터 해보았다. 여전했다. 모든 것이 여전히 두 개로 보였다. 갑자기 겁이 엄습했다. 정말 내 뇌에 무슨 이상이 생긴걸까? 그때 마침 O한테 이른 아침 인사와 함께 오늘은 컨디션이 어떤지 문자가 왔다. 우리는 전화 통화할 사이는 전혀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너무 불안해진 나는 O에게 전화를 했다.

I've got a double vision all of sudden. I see things in double, as if the left side of eye and the right side of eye forgot how to work together. Doctor told me it might be a problem in some part of my brain. I will have to go to the hospital to do the MRI test today. I'm a bit nervous now.

O는 적절히 공감하고 들어주다가도 너무 심각하지 않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짧은 통화를 마친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평소와 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침착하자. 별일 아닐 거야.

씻고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먹었다. 그러나 이 복시 증상 때문인지 나는 자꾸만 어딘가에 부딪히고, 칫솔이 아닌 엉뚱한 곳에 치약을 묻히는 등 사소한 실수를 반복했다.


다시금 불안해진 나는 한국에 있는 친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내가 지금 걱정되는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어제부터 물체가 두 개로 보여. 병원에 갔더니...

오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데 내 목소리가 많이 떨렸다. 아니, 떨리는 것뿐만 아니라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았다. 힘을 주어 말을 하려 노력하는데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어눌하게만 나왔다. 입 밖으로 빠져나오는 내 목소리와 말투에 패닉에 빠지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오빠는

야, 근데 너 왜 이렇게 울면서 얘기해? 라고 물었고 

말이 이상해.. 안 나와..

라고 간신히 대답한 내게, 오빠는 네가 지금 불안해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되물었다.


통화를 끝마친 나는 혼잣말로 중얼중얼 말하기를 계속 시도했다. 다시 말이 잘 되는 것도 같았다.

나름 덤덤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불안해서 떨려서 말이 그렇게 나왔던건가... 그래, 아침에 O와 통화했을 때만 해도 말이 잘 나왔었으니, 잠시 떨려서 그랬나봐.


하루 종일 연차를 내놓았지만, 꼭 참여하고 싶은 미팅이 하나 있었다. 입사하자마자부터 요청해서 받은 신입 멤버에 대한 일을 의논하는 미팅이었다. 며칠 째 연차인 나 때문에 그 친구가 일을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양해를 구하고 보이스 미팅으로 진행을 하는데, 말이 다시 어눌하게 나왔다. 아까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명백한 이상 증세였다. 이미 자초지종 설명을 할만큼 긴 문장을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30분짜리 미팅을 10분 안으로 가까스로 끝마친 나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뇌 MRI는 한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검사대에 누워 한 손에는 비상벨을 쥐고, 간호사가 내 머리에 무언가를 씌울 때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좋은 생각만 하자.

검사가 시작되고 나는 철저히 유쾌한 생각만 하려고 노력했다. 이거 마치 EDM음악과 공사장 사운드를 섞은 후에 머리에 확성기를 대고 주입하는 그런 느낌이네, 내 뇌가 이 리듬에 맞춰서 춤을 추는 건가? 뇌가 한시간 클러빙 한다고 생각하자.


뇌 MRI를 마친 신경의는 다행히 중추신경의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내게 근력이 어제보다 약해진 것 같다며 Myasthenia gravis (MG, 중증근무력증)일 가능성이 있다며 약 처방을 해주었다. 만약 MG가 맞다면 약을 먹자마자 차도를 보일 거라면서. 나는 갸우뚱했다. 그 의사가 말한 나의 목과 등 근력 약화는 내가 며칠 째 그저 누워만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명을 모른다는 공포보다는 차라리 MG로 판명나기를 바라며 (그렇다고 해서 쉽거나 가벼운 질병은 아니며,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고 했다.)  그 약 처방을 따랐다.


+ D6 금요일

아침이 밝았다. 모든 것이 여전히 두 개로 보였다. 어제 MG 약을 먹고 잤지만 효능이 없었던 것이다. 세수를 하려고 거울을 보았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내 눈은 사시가 되어있었다.사실 지난 며칠 간 사시가 되어가는 내 눈을 직시하지 않으려 애썼는데, 오늘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무너지고자 하면 겉잡을 수 없이 겁이 날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나마 들어갈 것 같은 과일을 배달시켜 꾸역꾸역 먹었다. 차가운 걸 입에 대는 순간 바로 입 안이 따끔거렸기에 상온에 한참 둔 후 먹어야 했다.

오늘부터는 한 단어조차도 잘 나오지가 않았다. 한 단어를 말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여도 그 어눌함과 발음의 부정확성 때문에 상대방이 알아듣기 힘들어했다. 전화 오는 것이 곤혹스러웠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못하는 내가 절망적이었다. 

말이 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잘 대처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존에 대한 위협감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한, 손이 저리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팔에 힘이 없어지는 단계였다. 물건을 드는 것이 약간 힘겨웠다. 오늘은 안과의사와 진료를 잡아두었다. 내 병의 주원인은 신경과 관할로 보고있기는 했지만 안과 의사와도 진료도 잡아두었다. 의사와 상담을 하기 위해서 펜과 종이를 요청해야만 했다.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증상과 질문을 수기로 마친 나는 마지막 질문을 종이에 적었다.


Is it safe for me to stay at home to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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