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즘은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몸에 반응이 온다. 마음을 달래려 연희동에 있는 계절과일을 파는 가게에서 토스트와 차를 시켰다. 지난번에 우연히 들렀다가 십 년도 넘었던 파리를 갑자기 떠올리게 한 곳. 이국적인 분위기를 흉내내서서가 아닌, 복숭아와 살구로 만든 넥타, 매끄러운 치즈, 적당히 짭짤한 소금이 그곳의 음식이 연상되었던 곳. 파는 음식과 차 등을 흔쾌히 내어주며 테이스팅 해보라고 권하는 자연스러운 문화가 있어 신기했던 곳.
오늘은 다른 자리에 앉아 치즈를 만들고 빵을 자르는 사장님을 바라보며 손풀기용 소설을 썼다. 일명 '빌어먹을' 시리즈인데, 가볍게 떠오른 아이디어 치고 '사건 진행'이 되어서 손바닥 소설처럼 치고 나가는 방식으로. 요즘은 쓰던 소설이 아니라 자꾸 딴 소설을 쓰고 싶어 진다. 이건 이십 대에 정말 아무 소설이나 습작할 때 방황하던 시기랑 비슷하다. 진행해야 할 소설의 앞도 끝도 보이지 않는데 글은 쓰고 싶은 상태. 그 마음을 달래려 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와 마가렛 애트우드의 '스톤 매트리스'를 꺼내 들었다. 클레어 키건 작품은 올해 추천받아서 처음 읽었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울림을 주다니.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 부류랑 비슷하다고 할까(레이먼드 카버, 앤드류 포터,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푸른 들판을 걷다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첫 작품부터 매우 충격적이었다. 클레이 키건은 아일랜드 출신인데, 영문과 교수님이 아일랜드에 관해 얘기해 주신 게 떠올랐다(가장 좋아했던 교수님. 닮고 싶었던 멋진 교수님). 먹을 건 감자 밖에 없고, 소가 지나가면 다 지나가길 서너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고. 척박하다고. 영국이 점령해서 아주 우울한 분위기가 있다고. 제임스 조이스에 관해 설명하시면서 유학 경험을 얘기하시는데 진짜 치를 떠시는 것 같았다. 쓸쓸하고 무거운 아일랜드의 풍경이 '더블린 사람들'에도 잘 드러나있었는데, 어쩐지 이 소설도 단편적으로 아일랜드를 뚝 잘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어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평소에 전투적이라 느끼는 여성 작가들의 책을 앞으로 빼두었다.
클레이 키건, 마가렛 애트우드, 줌파 라히리, 리디아 데이비스, 한나 아렌트, 김숨, 박서련 등. 책이 아직 뒤섞여있어서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흰이 안 보여서 슬펐지만, 어차피 노벨상 에디션으로 나오면 또 살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