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노트 번외편 - 남편의 프로젝트
나의 아내가 우울증에 걸렸다.
그것은 오롯이 본인이 혼자서 이겨내야만 하는 수 밖에 없는 질병으로,
처음 아내의 상태를 공유받은 나로서는 도무지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몇달동안이나 남편으로서, 가장 친한 친구로서, 또 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동시에
그녀를 지켜봤지만 도저히 나아지지 않는 기미에 애가 닳았다.
이 병의 가장 큰 특징은 '우울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내가 우울증에 걸린 뒤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인 '무기력증'.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불안해하면서도 무언가 해야한다는 것은 더 두려워 했다.
그런 불안증세가 그녀를 더 '무기력'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어떻게든 아내의 기력을 되돌려야한다.
주말이면 아내를 데리고 이곳저곳에 다녀도 보고, 평소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였던 분야라면 클래스도 들어보라고 응원하며 내가 보낼 수 있는 지지를 다 보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났을까. 아내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는게 보이기 시작했다.
요근래 아내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아침수영'이다.
일주일에 딱 세 번, 월/수/금 수업을 듣는데, 어쨌든 수업이 있는 날만큼은 일정한 시간에 기상하고 움직이면서 나름의 성취감을 얻는 듯 보였다. 확실하다. 수영을 시작한 이후로 아내는 급격하게 달라진게 보였다.
백지같던 매일에 루틴한 생활이 생긴 것이다. (물론 월/수/금만..)
그런 아내를 지켜보는 나로서는 크게 기쁘면서도, (주말엔 내가 옆에 있으니 크게 걱정할게 없지만)화/목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집에는 책도 많이 있고 피아노도 있고 컴퓨터도 있지만 아내는 그 무엇에도 손을 대지 않는다. 하루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내를 생각하면 언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지 몰라 불안했다.
그리하여, <아내 움직이기 프로젝트 : 1일 1퀘스트>를 고안해낸 것이다.
처음엔 어떻게든 그녀를 움직이게 하고 싶어서 도보 45분 거리의 카페에 아내를 보냈다.
첫번째 퀘스트 : 해당장소(지도첨부)에 가서 커피 한 잔을 하고 동영상을 찍어 오시오.
보상 : 10,000원
아내는 흔쾌히 퀘스트를 수락했다. 내 피같은 용돈에서 지출되는 보상금이지만 뭐 어떠랴.. 내가 커피 두 잔 안사먹으면 되는거지. 일단 얘를 좀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아내는 지령을 받자마자 '출발!'이라는 메세지와 함께 중간 중간 본인의 위치를 찍어서 나에게 전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해당 장소에 도착해서 동영상을 촬영해 내게 보냈다. 꽤 신이 난 눈치였다. 생각해보니 내 아내는 과거 RPG 게임 매니아였지.. 아무튼 첫 번째 퀘스트로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에 흡족했다.
다음날인 수요일. 수영을 다녀오는 날엔 퀘스트를 안 줄 생각이었는데 어제 하루 재밌었는지(혹은 보상금이 쏠쏠했는지) 아내에게서는 오늘의 미션은 없냐는 카톡이 먼저 날아왔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맛있는 빵을 먹고 싶어져서 곧 두 번째 퀘스트를 던졌다.
두번째 퀘스트 : 해당장소(지도첨부)에 가서 빵을 사오시오.
보상 : 5,000원
아내는 1분도 안되어 칼답장을 보냈다. '지연님이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도 재밌어지기 시작한다.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지 첫 주가 지났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나의 아내는 다음주 미션은 어떤걸 줄거냐며 눈에 생기가 돈다. 덩달아 나도 다음주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