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서 온 친구, 사라네 집에 초대받다
Today's BGM - C.V Jørgensen - Bellevue
글과 함께 들어주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LX5EdA4Gisk
핀란드에서 온 사라Sarah는 나와 같은 오스나부르크 대학교를 다니는 친구다. 얼마 전 결혼한 사라는 남편과 귀여운 아기와 함께 오스나부르크에서 살고 있다.
마치 엄마처럼 우리를 챙겨주던 다정한 사라. 어느 날 우리는 그녀의 집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사라의 집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 지역에 있어서, 처음 타 보는 22번 버스에 몸을 싣고 목적지로 향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낯선 풍경이 새삼 새롭고 신기했다. 30분 정도 달렸을까, 푸릇푸릇 나무가 울창한 어느 기차역 앞에 도착했다. 오스나부르크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자연으로 둘러싸인 아주 평화로운 동네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사라네 집 앞이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 노크를 하자 사라와 그녀의 남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같은 학기 교환학생으로 파견된 핀란드 친구 시르케 Sirke와 폴란드 친구 나탈리아 Natalia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부부는 한창 열심히 저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아늑한 거실로 들어서자 식탁이 보였고 비스듬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은 참 예뻤다.
아늑하고 포근한 집이었다. 화이트 톤의 깔끔한 가구와 벽지는 왠지 모르게 북유럽스러운 느낌을 풍겼고, 곳곳엔 아기를 위한 담요와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아기는 어찌나 순하던지 낯선 우리를 보고도 그저 까르르 웃기만 했다.
거실 한 구석에는 피아노도 있었다. 오랜만에 피아노를 보곤 반가운 마음에 사라에게 허락을 받고 피아노를 잠시 연주했다. 아주 오랜만에 치는 탓에 손가락이 제멋대로 굴러갔지만, 친구들은 고맙게도 박수를 쳐 주며 칭찬해 주었다.
얼마 뒤 식사가 완성되었고, 모두가 식탁 앞에 모여 앉았다. 접시와 수저 옆에는 깨알 같은 나뭇잎 장식과 이름표도 놓여 있었는데, 사라가 내 이름을 헷갈려서 '정은'을 '은정'으로 써둔 걸 보곤 피식 웃음이 났다. 너무 귀여운 실수잖아!
많은 외국 친구들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나의 이름. 앞뒤는 바뀌었지만 정확한 스펠링으로 기억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사실 한국에서도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친구들은 나를 종종 '은정'으로 잘못 부르곤 했기에, 그때마다 이름을 은정으로 바꿔야 하나 잠시 고민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메인 요리는 연어 수프! 날이 추운 핀란드에서 자주 해 먹는 음식이란다. 꾸덕한 크림치즈가 발린 통밀빵도 함께 식탁에 올랐다.
각자 한 그릇씩 따끈한 수프를 받고 식사를 시작했다. 고소하고 담백한 연어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오묘한 맛의 통밀빵도 수프에 적셔 먹으니 그야말로 찰떡궁합. 생선이 귀한 독일에서 연어를 먹은 게 대체 얼마만인지. 맛있어서 순식간에 접시를 비우고 한 그릇 더 먹어버렸다.
식사를 마친 뒤엔 티타임을 가졌다. 사라는 핀란드의 대표 캐릭터 무민이 그려진 다양한 맛의 차를 가져왔다.
알록달록한 차 봉지에는 핀란드어로 여러 문구가 쓰여있었는데, 우리가 무슨 뜻이냐고 사라에게 물으니 하나씩 대답해줬다. 'Good Luck!', 'You are Lovely'부터 '무민 엄마의 파워 드링크'라는 문구까지. 전부 아기자기하고 귀엽기만 하다.
나의 선택은 블루베리 홍차. 티백을 뜯어 우려내고 달달한 캐러멜이 들은 초콜릿을 베어 물었다. 이렇게 달콤할 수가! 이건 독일에서 파는 초콜릿 'Toffifee'와 비슷한 스웨덴 초콜릿 'dumle'인데, 자신들이 평소에 정말 좋아하는 간식이라고 했다.
달달한 간식시간을 가지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두 부부가 대화할 땐 핀란드어가 들리곤 했다. 묘하고 신기한 핀란드어. 어딘가 러시아와 비슷한 것도 같다. 두 나라가 가까이 붙어 있어서 언어도 서로 영향을 받은 걸까?
대화를 나누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냥, 이렇게 가정을 꾸리고 서로 아이를 돌보며 키워 나가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달까. 부부의 여유로운 마음과 가치관이 부러웠다. 참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서머타임이라 그런지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날이 밝았다. 소화도 시킬 겸 다 같이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섰다.
저녁이 올 무렵의 산책. 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마을을 걷다 보니 어느덧 저 멀리 노을이 지고 있다. 한산한 주말 저녁 거리. 교회도 보이고 문을 닫은 상점도 보인다. 돌담 위엔 길고양이가 가만히 앉아 있다. 우연히 마주친 가정집 앞에는 하얀 꽃들이 만개해 있어 너도 나도 감탄하기 바빴다.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걸까?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천천히 걷던 중 사라는 문득 나의 검은 머리색이 원래 머리 색이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답하니- "I Love Your Hair Color." - 예쁘다며 칭찬해 주었다. 난 오히려 사라의 연갈색 머리칼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나에겐 그저 익숙하기만 한 머리색이 누군가에겐 예뻐 보일 수 있구나. 기분이 괜스레 좋았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나른하고 기분 좋은 꿈을 닮은 산책.
그렇게 해가 저물 때까지 마을 한 바퀴를 뺑 돌고 사라네 집으로 돌아왔다. 깜깜해진 하늘을 뒤로하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
고맙게도 사라의 남편은 늦었으니 우리를 데려다주겠다며 기숙사 앞까지 차로 바래다주었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더욱 따뜻해진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따금 종종 이날을 떠올린다.
소박하고 따스한 핀란드 가정식과 우리를 반겨준 사라네 가족과 친구들. 편안했던 대화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했던 저녁 산책까지.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오지 않았다면 결코 오지 않았을 순간이었겠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내겐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