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정답은 없다고들 말하지만
Today's BGM
Archie James Cavanaugh
- Light Unto The World
나를 단숨에 제주의 가을로 데려다 놓는 곡.
책방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이번 제주 여행의 테마곡이 되었다.
성산에서 머무는 숙소엔 슬프게도 책상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글을 쓰고 있다.
여행에 왔지만 에디터로 참여하는 독립잡지 기사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기사를 고치고 고쳤다. 놀러 와서 기분이 붕 떠버린 건지 글이 영 제멋대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주엔 맛있는 음식이 많아 배가 고플 틈이 없다. 오늘도 맛있는 걸 많이 먹었다. 온몸이 시릴 만큼 차가운 물회는 신선한 소라와 전복, 멍게로 가득했고 함께 시킨 전복죽도 어찌나 고소했는지 모른다.
저녁에는 제주도에 사는 친구들이 추천해준 흑돼지 돈가스 집을 갔는데, 이제껏 먹은 것 중 손꼽을 만큼 맛있어서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다.
점심을 먹고 방문한 빛의 벙커는 기대 이상이었다. 마침 고흐와 고갱 전시를 하고 있었기에 참 운이 좋았지.
영화관 같이 깜깜한 공간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음악과 찬란한 영상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그들의 작품이 살아있는 듯 움직이며 휘황찬란한 모습을 뽐냈고 황홀한 클래식 음악에 모두가 압도됐다. 전시를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엄마도 감탄을 멈추지 못하셨다.
나와 엄마는 고흐를 참 좋아한다. 독일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엄마와 유럽을 여행할 때도 고흐의 작품 앞에 한참을 서 있었으니까.
평생을 외로움과 맞서 싸우며 불행한 삶을 보냈지만 누구보다 여린 마음을 지녔던 사람. 그의 전기 영화 <영원의 문에서>를 보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영화관을 나오던 때가 생각난다. 슬픈 그의 생을 떠올리니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져 감상하다 보니 벌써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의 첫 목적지였던 '책방 무사'. 싱어송라이터 요조가 운영하는 책방으로도 유명한 이곳은 꼭 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다.
늦잠을 자고 여유로운 아침 방문한 서점은 내가 첫 손님인 듯했다. 책방은 일본 라디오를 틀어둔 듯 진행자의 목소리와 음악이 번갈아 흘러나왔고, 나오는 곡이 다 좋아서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됐다.
서가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이번엔 무슨 책을 사 갈까 고민하던 중, 작가 이슬아의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에서 알게 된 유진목 시인의 시집을 골랐다. 진초록색 표지의 책 제목은 <식물원>. 결제를 마치곤 표지 앞장을 펼쳐 책방 도장도 야무지게 찍었다.
책방에 머물며 계속 생각했다. 나중에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나만의 독립서점을 차리는 건 꽤 오래전부터 꿈꿔온 일이다.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여 글을 쓰는 모습을 종종 상상한다. 모두 낭만에 불과한 생각인 걸까.
요즘은 절반 가량 남은 20대를 어떻게 보내야 후회가 없을지 고민이다. 서가를 둘러보던 중 얼마 전 채용공고가 났던 매거진을 마주했을 땐 기분이 묘했다.
물론 지금 멋진 친구들과 함께 독립 매거진을 만들고 있지만, 이게 내 직업이 될 순 없을까? 좋아하는 일은 돈이 될 순 없는 걸까.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어떻게 딱 한 개만 고를 수 있나. 이 끝없는 고민은 언제쯤 끝이 날지 갑갑하기만 하다.
잠들기 전, 책방에서 사 온 책을 펼치고
가만히 코를 대고 숨을 들이쉬어 본다
엿 푸른 풀잎 향이 나는 것 같다
글에 나온 공간들
: Good Places to Visit
책방 무사
서귀포시 성산읍 수시로 10번길 3
막둥이 해녀 복순이네
서귀포시 성산읍 서성일로 1129
빛의 벙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9-22
범식당
서귀포시 성산읍 한도로 66 2층
불과 6개월 전에 썼던 글인데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제가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게
새삼 낯설고 신기하네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모르겠는 요즘이에요.
모두들 건강하시길 바라며
곧 6번째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