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를 배우는 이유
수어는 소리 없이 손과 표정으로 의미를 전하는 언어이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농인들만의 언어입니다. 누군가는 수어를 그저 손짓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립니다. 하지만 수어는 같은 단어지만 다양한 수어 표현을 가지기도 하고 같은 수어지만 표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고유한 언어체계를 가진 엄언한 언어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매력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서 잘 나타내주기도 한다는 것을 아시나요? 수어는 농인과 수어통역사라는 두 존재를 존재로서 가능하게 합니다. 수어가 있기 때문에 농인이 농인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수어통역사가 수어통역사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수어가 없었다면 농인은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는 농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고, 언어를 전달하기 위한 수어통역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어라는 매개체 덕분에 농인과 수어통역사가 각자의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농인과 수어통역사는 서로가 서로를 존재할 수 있게 합니다. 소리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언어인 수어는 누군가는 알지만 누군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수어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 아는 이들을 이어 주기 위해서 수어통역사라는 다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농인은 수어를 아는 자로서 다리가 되는 이들이 존재하게 합니다. 즉, 농인과 수어통역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농인을 돕기 위해서 수어통역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농인으로 인해 수어통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서로에게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농인은 수어통역사가 있음으로써 청인과 연결될 수 있고 수어통역사는 농인이 존재함으로써 통역사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수어는 말과 의미를 전하는 언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치를 지닌 언어입니다. 이런 수어를 배우는 것 자체가 언어를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 됩니다.
코로나19 때 '덕분에'라는 의미로 오른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는 수어가 한창 매체에 등장했었습니다. 사실 수어로 따지면 해당 수형의 의미는 '존경하다'를 담고 있으며 '덕분에'는 다른 수형을 가지고 있지만 수어가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 스며들게 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존재로서 존재하게 하는 수어를 통해 농인과 수어통역사가 서로 상생하는 것도 좋지만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수어가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수어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뤄지는 언어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하는 언어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