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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내는 농촌 여성들

책 ‘촌촌여전’ 출간한 경북 상주 여성 15인

by 월간옥이네 Mar 12. 2025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농촌은 종종 상상의 공간이 된다. 누군가에겐 무조건적인 환대의 공간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어둡고 폐쇄적인 공동체로. 환상과 편견의 극단을 오가곤 하는 것이다. 농촌을 직접 경험할 기회가 적고 학교에서도 농업을 가르치지 않는 사회에서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 반가운 책이 출간됐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촌촌여전(村村女傳)’이다. 경북 상주에서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따라 지역에 뿌리내린 열다섯 여성 - 농민, 연구자, 청소년, 동네책방 주인, 교사, 주부 등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그중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농촌과 함께한 이도, 도시로 떠났다 다시 돌아온 이도, 새로운 삶을 찾아 이주한 이도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농촌을 살아내며,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와 의미를 발견해 가는 이야기는 이 책을 단순한 농촌 생활기에 머물지 않게 한다. 도시와 농촌, 과거와 현재,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여성들이 겪어온 고민과 선택, 성장과 연대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는 ‘농촌 여성’이라는 기존의 편견에 질문을 던지고, 미처 알지 못했던 농촌 풍경을 새로이 그려낸다.


열다섯 개의 다채로운 이야기는 한 가지 공통된 깨달음도 찾아낸다. 농촌에서의 삶 역시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그 속에는 저마다의 도전과 희망, 끈끈한 유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촌촌여전’은 그 생생한 순간을 기록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잘 살고 있나요, 당신?”



120명의 축하 속에 열린 출판기념회

따뜻하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촌촌여전’의 출판기념회가 지난 2월 15일 경북 상주시립도서관 상상홀에서 열렸다. 50여석 규모의 행사장엔 120명이 넘는 축하손님이 몰리며 인산인해를 이뤘다. ‘촌촌여전’의 열다섯 저자 모임 ‘상주함께걷는여성들’도 총출동했다. 이들의 활동을 지원한 상주다움사회적협동조합과 상주시 관계자도 함께했다.


출판기념회의 막은 ‘촌촌여전’ 저자 중 한 명인 황진영 씨의 자작곡 ‘외갓집’ 공연으로 올랐다. 따뜻한 음악 다음으로 상주다움사회적협동조합 윤신천 이사장이 환영사를 전했다. 그 역시 12년 전 귀촌해 귀농귀촌 공동체를 꾸리는 등 협동과 연대의 문화를 일구어온 사람 중 하나. 그런 만큼 ‘촌촌여전’ 발간이 남다르게 닿은 듯했다.


“지역과 여성, 삶을 연결하는 다양한 모임과 활동을 이어왔는데요. 그때마다 우연의 만남, 필연의 산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촌촌여전’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오래전부터 상주에 사는 우리 여성들은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먼저 길을 낸 여성들, 그 길을 함께 걷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촌촌여전’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 되었습니다. 이 길 위에 힘을 보태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더불어 ‘한 여자가 한 세계이고, 하나의 도서관’이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상주 여성의 오래된 이야기가 걸어나와 우리의 삶을 더 웅숭깊게 하리라 기대합니다. 우리에게 새겨진 오랜 지혜를 이끌어내 지역 생태계를 더 단단하게 할 두터운 우정을 만들어 갑시다. 그렇게 또 두 번째 촌촌여전으로 출발하길 바라봅니다.”


“내가 잊고 살던 삶에 대한 회고” 같았다는 평을 남긴 상주시 강영석 시장은 “도시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상주다움’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이번 작업이 후대에 의미 있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는 축사를 전하기도 했다.     

 


서로의 삶을 나누는 목소리

저자들이 서로의 글을 낭송하는 시간, 무대에 올라 자신의 삶과 글을 직접 소개하는 순서도 이어졌다. 독자들이 직접 책을 읽은 소감을 전하기도 했는데, 19년째 상주에서 살고 있다는 노수진 씨는 “책 속에서 내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며, 다른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지역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최진희 독자는 “2020년 상주로 이주해 1인 가정으로 살고 있는데, 이 책이 내 삶을 응원해주는 느낌이었다”며 “일상의 과정 속에 고됨이 있더라도 자연과 이웃이 주는 위안과 연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재순 독자는 “책을 읽으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며 “평생 몰랐을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을 이 책 덕분에 처음 알게 됐다”는 감동을 전했다.


“저자 중 몇몇과 공부모임을 하고 있다”는 김효근 씨는 “모항(母港)이 있는 배가 멀리 간다”는 우치다 타츠루 작가의 말을 인용하며 독후 소감을 전했다. 


“제가 어릴 적 지역아동센터장님께서 ‘센터를 거쳐간 어린이들이 어른이 돼서도 마음 편히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나요. 저에게 상주는 모항인데요, 이처럼 상주에서 공동체 활동을 꾸려가시는 분들 덕에 제가 이 정도나마 스스로 설 수 있는 어른이 됐다고 생각해요. 제가 ‘촌촌여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 모항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런 차원에서 상주가 꼭 지방소멸을 극복하고 대도시가 되어야 할까에 대한 의문이 있어요. 상주의 미래를 상상할 때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빼놓고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상주 밖의 소리보다 상주의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이 ‘촌촌여전’에 담긴 목소리들을요.”          





저자 3인에게 듣는

농촌에서 나답게 살기     

곽경미, 김정열, 김주애, 김혜련, 남수영, 노니, 박현정, 박환순, 변영진, 우경화, 전미희, 정경해, 정숙정, 파도, 황진영. ‘촌촌여전’을 다채롭게 채운 ‘상주함께걷는여성들’의 15인이다. 누구보다 작은학교를 사랑하는 선생님으로, 논밭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큰 행운이라는 농민으로, 어린이들이 즐겁게 활동할 공간을 만드는 장터 기획자로, 삶의 전환을 꿈꾸며 상주를 찾아 자연을 공부하는 주민으로, 기후위기와 페미니즘과 농촌 공동체를 연결하는 일을 끊임없이 구상하는 활동가로…….


이들 중 동네책방을 운영하는 노니, 공부모임을 통해 지역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는 김혜련, 탈학교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지역살이를 이어가는 파도 씨에게 인터뷰를 청해봤다. 지면 관계상 채 다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촌촌여전’을 통해 확인해보시기를. 상주를 넘어 모든 지역 여성에게 전하는 용기를 함께 만나보자.     

책방을 넘어 삶을 나누는 공간으로

서울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한문교사로 일했던 노니 씨는 이후 여성의류 쇼핑몰, 인테리어 조명회사에서 일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삶이 점점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며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2019년 ‘청정경북 프로젝트’1)를 통해 상주에 첫 발을 내딛은 노니 씨. 상주다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일하며 지역사회를 만난 그는 2020년 ‘좋아하는서점’이라는 이름의 동네책방을 열며 본격적인 상주 주민이 됐다.


서울에서 다시 뭘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그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도 없었다는 그에게 처음 상주에서 보낸 6개월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귀촌 생활이었다.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고 사랑받는 느낌이었어요. 서울에서 개인주의적으로 살아왔던 저로서는 신선한 경험이었죠.”


하지만 어찌 좋은 일만 있으리. 지역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역살이의 민낯을 마주하기도 했다. 의지했던 공동체가 흩어지고 와해되는 과정도 지켜봤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면서도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가 상주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가게 된 데는 ‘새로운 정체성’이 있었다. “서울과의 불화가 컸다”는 그에게 상주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서점 운영자이자 글 쓰는 사람이라는, 제가 좋아하는 일로 새롭게 만든 제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공동체의 지지와 이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크죠. 자연이 궁금하고 경쟁이 싫은 저는 서울에선 ‘현실감 없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져요.”


서울에서보다 더 가까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버겁고 싫은 순간도 있었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과정임을, 사람 사는 일의 자연스러움을 배웠다고. 특히 서점을 운영하며 만난 관계 속에서 새삼 연결의 기쁨도 느끼고 있다.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이 떠나면서 한때 혼자 고립됐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가벼운 연결을 보이게 하더라고요. 서점 손님,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촌촌여전 작가님들……. 다들 느슨하지만 따뜻하게 연결돼 있었어요.”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문제다. 특히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농촌으로 이주하거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할 때, 책 한 권이 커다란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노니 씨는 ‘촌촌여전’이 그런 순간을 만들어낸 순간을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대구에 살다 결혼을 하며 상주에 이주하게 됐다는 여성분께 이 책을 선물했는데요, 다시 대구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상주에 남기로 결심하셨다고 전해주셨어요. 자신 역시 이곳에서 해야할 일이 있을 것 같다,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셔서 정말 기뻤어요.”


그는 지역에서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고 확장되는지를 계속 경험하고 있다. 서울에 살 때는 알지 못했던 지역 여성들의 주도적인 삶, 그 관계 맺음 속에서 자신 역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말이다.

“제가 운영하는 서점 역시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꾸려가고 싶어요. 그렇게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응원하는 순간을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공부와 기록으로 연대하기

책에서 ‘함께 하는 공부’의 힘을 전한 김혜련 씨. 국어교사로 20여 년을 근무한 그가 대안적인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여성학을 만나면서부터. 서울에서 경북 경주로 이주한 후 공부 모임을 꾸렸던 그는, 환갑의 나이에 다시 경북 상주로 삶터를 이전하며 삶의 영역뿐 아니라 공부의 접점까지 계속 넓혀가는 중이다. 에코페미니즘 연구센터 ‘달과 나무’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는 그에게 상주라는 공간은 지역과 여성의 삶을 연결하고 바라보는 데 더 없이 안성맞춤이었을 터. ‘촌촌여전’ 기획과 출간에 함께하게 된 것도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어졌을 테다. 그런 그는 지역 여성들이 스스로의 삶을 기록하는 의미를 다시금 강조한다.


“도시 문명은 지역의 소리를 듣지 않고, 중심 문명은 여성의 소리를 듣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변방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시대예요. 기후위기가 닥쳤고, 이제는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할 때잖아요. 이런 시기에 여성들이 자신을 기록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더욱 중요해요. 개인주의가 가혹할 정도로 팽배한 지금, 무제한적인 소비를 촉구하는 집요한 중심 언어에 대항하는 지역 여성들의 목소리인 거죠.”


그는 여성들이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 역시 이번 작업의 큰 성과라고 설명한다. “내 삶 별 거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글을 쓰며 자신을 긍정하는 시간을 만난다는 것이다.


“도시를 동경하고 유명인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볼 때 많이 속상해요. 빛나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엉뚱하고 허황된 빛을 쫓게 하는 데서 벗어나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나의 목소리, 평범한 삶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야 하고요. 지역 여성들이 자기 글을 쓰며 자기 삶을 새롭게 보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자긍심을 가지는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이 과정을 통해 지역 여성들이 서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평가이기도 하다.


“책을 만들면서 저자들이 서로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어요. 출판기념회 때도 서로 협력하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고 감동적이었죠. 이게 바로 연대의 힘 아닐까요?”


그는 이 책이 또 다른 여성들에게도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파편처럼 흩어져 고립된 삶이 아닌 ‘연결의 기쁨’을 지금의 젊은 여성들이 꼭 만나기를 희망한다.


“사람의 상상력도 경험을 통해 생기는 것이죠. 그 상상력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꽃 피울 수 있는데요. 상주 여성들의 이야기가 막막하게 살아가고 있는 다른 여성들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며, 땅과 삶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게, 조금 더 덜 외로운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떠나는 것이 아닌남기로 한 용기

평소 글쓰기를 좋아했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이 흥미로워 ‘촌촌여전’ 집필에 참여했다는 파도 씨. 그는 탈학교 청소년 시절부터 현재 청년 활동까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냈다. 현재 모디(상주청소년문화센터)에서 청년 인턴십 활동을 하고 있다는 그는 이번 ‘촌촌여전’ 중 김주애 씨의 글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고.      


어쩌다 지역에 남는 것이 주눅 들고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을까. 남겠다는 결심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그 용기를 누가 감히 하찮다고 하는 것일까.
(...)
지역은 상생의 방법으로 동서남북 길을 내는 데 열을 올린다. 사방 연결되지 않은 곳이 없다며 지역을 홍보하고 현수막을 걸어 과시한다. 하지만 정작 떠난 아이들은 그 길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주저한다. 돌아오는 것이 실패는 아닌데도 그 아이들을 위한 길은 없는 것이다. 
-‘촌촌여전’ 중 ‘지역이란 오래된 이야기(김주애)’ 일부 발췌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선생님의 글인데, 지역을 떠나거나 남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라 저 역시 공감하며 읽었어요. 지역에 남기로 한 결정은 저에게 자부심 있는 일이었는데 주변에서는 부끄러운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그 글이 큰 위로가 되었죠.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지역의 많은 여성 어른들을 만나며 관계를 맺고 함께 공부하기도 하면서 그 품을 느끼고 배우고 있다는 파도 씨. 이 책을 통해서는 각기 다른 분야의 여성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단다. 평소 자신에게 도움을 주던 이들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눈길이 가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지역에서의 삶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답답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분명 그에게도 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가능성을 보고 있다.


“서울이나 대도시처럼 모든 게 갖춰진 환경에서 무언가를 하기보다, 내게 필요한 걸 직접 만들어 가는 과정이 더 재밌다고 생각해요. 물론 경제적인 부분이나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지역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가고 싶어요.”


책을 쓰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깨달았다. 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접하며 글을 남기는 것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공감과 연대를 만드는 일임을 배우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도 계속 지역에서의 경험을 기록하고 싶다.


“여기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과정을 글로 남기고 싶어요. 그것이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 마디를 남겼다.


“지역살이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상주에 와보세요. 상주는 꽤 살아갈만한 곳이고, 여기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만들 수 있거든요.”                    





함께 걸으면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

‘촌촌여전’ 기획자 정숙정 씨     


‘촌촌여전’은 지역 여성들의 고민과 실천을 담아내며 ‘지역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사유를 공유한다. ‘상주함께걷는여성들’ 모임과 ‘촌촌여전’ 출간을 제안하고 기획한 정숙정 씨를 만나 그가 ‘촌촌여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지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들어봤다.     


촌촌여전의 시작

2024년 1월, 국립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가 주최한 마을이살림캠프에서 ‘기후위기 시대, 지역 여성들의 연대와 실천’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어요. 지역에서는 기후위기와 돌봄위기가 맞물려 복합적인 위기가 발생하는데, 이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촌촌여전’을 기획하게 됐고요. 사실 오래 전부터 지역에서 탈성장 가치를 실현하는 돌봄 모델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가난해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삶, 상품화되지 않은 상호돌봄, 존엄한 노후에 대한 고민이지요.


상주는 이미 다양한 공동체 문화가 형성된 곳이기도 해요. 연극, 음악, 농산물 꾸러미, 인문학 강연, 명상, 생태텃밭, 기후위기 비상행동 등 여러 활동이 이어지고 있죠. 하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 있어요. 같은 지역에 살아도, 귀농인과 선주민, 여성농민과 비농민 여성, 청년과 노년 등 각자의 삶의 궤적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지역살이를 선택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했어요. 2024년 2월, 상주다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열린 모꼬지’를 열어 단행본 발간을 제안했고, 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스무 명의 필진이 모였고, 그중 열다섯 명이 끝까지 함께했네요.

실은 책 발간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서로를 더 잘 알고자 하는 과정이었어요. 또 우리가 지역에 살며 맞닥뜨리는 갈등과 고민을 잘 풀어가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고요.      


나도 이곳에서 마음을 모으며 살아야겠어라는 말

책이 나오자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어요. 다양한 시선이 담긴 책이다 보니, 독자들마다 감동 받는 부분이 다르더라고요. 어떤 독자는 귀농 이야기에, 어떤 독자는 청년들의 고민에, 또 다른 독자는 작은 학교 이야기나 지역 경제 활동에 관심을 보였어요.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식당을 하는 친구에게 책을 선물했는데 그 친구가 단번에 읽고는 울면서 전화를 한 거예요. “다들 이렇게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나도 이곳에서 함께 마음을 모으며 살아야겠어”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그 친구(노수진 씨)가 출판기념회에서 독자 발언을 하고 뒤풀이까지 준비해 주었어요.


출판기념회는 그야말로 동네잔치였죠. 60명 정도 올 줄 알았는데 120명이 넘게 오셨거든요. 청소년들도 와서 자발적으로 일을 거들었고, 농민분들은 정장을 꺼내 입고 오셨죠. 그냥 오셔도 되는데, 인심 좋게 포도즙, 곶감, 안동소주, 떡을 가져오셔서 나눠먹기도 했고요. 모든 기획과 진행이 자발적인 재능 나눔으로 이루어졌고, 덕분에 모두가 주인공이 된 따뜻한 자리였어요.      


텃밭과 에코페미니즘자연과 함께 사는 법

집 앞에 70평 정도 되는 텃밭이 있는데요. 우연히 시작해 어느덧 10년이 넘었어요. 텃밭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워요. 예상하지 못한 생명이 끊임없이 자라고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요. 도시에서는 흙 한 줌 보기 어려워서인지 다양한 생물을 오히려 싫어하지만요. 농촌에서는 흙에서 나온 것들이 자연스럽고 소중하게 여겨져요. 요즘은 많은 사람이 무균실처럼 관리된 식물공장(스마트팜)에서 키운 채소가 더 깨끗하고 건강하다고 믿잖아요. 사실은 자연 그대로의 흙에서 자라는 것이야말로 더 건강한 건데 말이죠.


텃밭을 가꾸며 만난 농민들은 저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어요. 농민들은 자연을 통제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아요. 농사는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의 연속이고, 땅과 식물, 계절을 고려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저도 한때 도시의 경쟁적인 삶을 성공이라 여겼던 사람이지만, 우리 농민들을 만나며 시야가 달라졌어요. 삶의 가치가 완전히 바뀐 거죠. 한편으로는 농촌이야말로 에코페미니즘이 활발히 논의되고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이지 않나 싶고요. 이제는 성평등, 에코페미니즘의 가치가 농촌에서 더 활발히 논의되었으면 해요. 생태적인 삶, 돌봄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삶이 더 존중받을 수 있도록요. 그런 삶이야 말로 농촌의 원형이기도 하잖아요. 


우정을 기반으로 한 끈끈한 연대

‘촌촌여전’ 이후 계획을 물어보시는데요.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다만 함께 걷다 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 믿어요. 앞으로도 밥모임, 텃밭모임, 공부모임, 글쓰기 모임을 통해 계속 만나고 이야기 나눌 거예요.


지역에서 어떻게 서로를 돌보며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돈이 없거나, 건강하지 않거나, 능력이 부족해도 너무 궁핍하지 않고, 너무 외롭지 않고, 가끔은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히 노년의 삶과 돌봄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우리는 늘 함께 생활하고 교류하면서도, 정작 누군가 아프거나 취약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그래서 요즘은 돌봄 공부를 함께 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병들고 약해진 이웃을 단순히 요양원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품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거죠.


지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때로는 외롭고 버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우정을 기반으로 끈끈한 연대를 만들 기회이기도 해요. 그렇게 함께 걸어가면서, 우리는 더 나은 길을 찾아가게 될 거라고 믿어요.     

월간 옥이네 93호(2025년 3월호) 

글 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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