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씨앗에 생명을 불어넣자

by 월간옥이네


토종 씨앗 지키고, 친환경 복숭아 농사짓는

정보희 · 김재식 씨


종종 우리가 먹는 음식에게 속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주 맵고 달콤한 떡볶이, 잊을 만 하면 생각나는 라면 스프, 고소한 기름 향, 자꾸 손이 가는 과자나 젤리 맛에 속고 있다는 것이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잠드는 날이면, 심심한 집 된장국이 생각나는 날이면 ‘그럼 무엇을 먹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다.

특유의 맛과 품위가 있는 가지, 달짝지근한 오이, 달고 알찬 호박, 맵고 달콤한 고추가 있다면 어떨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아름답고 담백하게 해먹는 요리가 나를 가득 채운다면 어떨까. 우리 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식재료도 요리도 다 씨앗에서 시작된다. 그동안 누구도 씨앗이라는 존재를 생각지 않았다. 그사이 씨앗은 제초제를 만드는 다국적기업에 의해 조작되고 더럽혀졌다. ‘토박이 씨앗’은 그렇게 영영 잊히는 줄 알았다.

친환경 복숭아 4천 평, 토종 종자 텃밭 200평을 가꾸는 김재식(61), 정보희(58) 씨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들어서 무엇을 남겨줘야 할까 고민했어요. 씨앗 밖에 없더라고요.”


싫어서 멀리한 농약, 좋아서 가까이한 씨앗

김재식 씨 고향은 안내면 장계리, 정보희 씨 고향은 옥천읍 수북리다. 경기도 인천, 성남 등에서 토목공사 일을 하다 IMF 때 사업에 큰 타격을 받으며 고향으로 내려왔다. 복숭아 농사를 짓기로 했고, 처음부터 친환경을 고집했다.

“농약 냄새도 싫고, 내가 먹는 거다 생각하니까 자연히 약을 등한시하게 됐죠. 옥천군농업기술센터 친환경대학도 다니고, 2003년부터 괴산 자연농업생활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약 서너 번만 치면 다 돈인데, 집사람도 저도 고생해왔죠.”

친환경 복숭아를 한살림에 납품한 지 10년째다. 김재식 씨는 한살림 생산자 연합회 남부 3군(옥천, 보은, 영동) 대표다. 다른 작물에 비해 친환경으로 재배하기 어려운 복숭아인 만큼 옥천복숭아 친환경 농가는 이원면에 두 집, 귀농한 딸과 김재식 씨 집뿐이다. 겨울이라 농사일을 조금 쉬나 싶었으나 모르는 소리다. 12월 말이면 내년 봄에 팔 모종을 키우기 시작해야 한다. 매년 400평 하우스에 모종을 키워 파는 정보희 씨는 이미 토종 호박 씨앗을 신문지 위에 널어 말려놓았다.

“토종 호박, 오이, 가지, 고추와 개량종 모종을 같이 팔아요. 개량종보다 맛도 좋고, 늦게 열려서 꾸준히 찾는 사람이 있어요. 많이 안 나가는 건 한살림에 그냥 주고요, 한살림에서 행사가 있을 때 토종 모종을 나눠주기를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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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맛은 달라

개량종보다 수확량이 적은 토종이 여전히 꾸준히 판매되는 이유는 다른 게 없다. 맛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씨앗을 심고, 수확하면 씨를 받아 겨우내 저장하고, 이듬해 제일 좋은 씨앗을 골라 심는 게 당연했던 김재식 씨는 그 맛을 안다.

“토종 오이는 늦게 따요. 맛은 달짝지근한 게 훨씬 좋고요. 개량종은 풋맛이라 니맛 내맛도 아니죠. 저희 먹을 때도 빨리 열리는 개량종 오이를 심고, 토종 오이가 열리면 개량종 오이는 뽑아버려요.

동이호박은 1m씩 길쭉하고 크게 자라요. 일반 호박보다 3~4배 큰 거죠. 당도도 훨씬 높아서 이거 먹다 시중 호박은 못 먹어요. 어릴 때 먹은 복숭아도 향이 훨씬 진했는데, 지금은 화학비료에, 농약에.... 자연이 주는 맛이 아니죠.”

먹을 만큼 수확 가능한 토종 씨앗은 꾸준히 찾는 사람이 있다. 반면 노랑참외, 사과참외, 개똥참외 같은 건 모양이 영 먹음직스럽지 않으니 반응이 오지 않는다. 김재식씨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얻은 씨앗을 심어보고, 먹어본다. 어떤 씨앗은 계속 심고, 어떤 씨앗은 자연스럽게 도태된다. 매년 더 나은 씨앗을 고르는 건 제초제를 견디게끔, 더 크고 많이 열매 맺히게끔 유전자를 조작하는 다국적기업이 하는 일과 다르다.


토종 알기, “당신의 의무”

토종 씨앗을 잃는 한국에 도래할 첫 번째 위기는 씨앗 로얄티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토종씨앗은 수십 년 지나도 가격변동이 없어요. 외국에서 들어오는 씨앗

은 다르죠. 로얄티가 붙어요. 벌써 고추씨 값이 비싸지고 있고, 점점 더 비싸질 거예요. 씨앗 가격이 폭등했는데 토종 씨앗 없으면 대책이 없어요.”

토종 씨앗이 사라지도록 재촉하는 첫 번째 요인은 소비자 의식이다.

“소비자는 벌레 안 먹고, 깨끗하고 좋은 거 찾잖아요. 깨끗한 것 속에 더 무서운 게 들어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정부에서 아무리 정책을 펴도 소비자들이 안 먹으면 소용없어요.”

올해부터는 유전자변형 감자가 수입될지도 모른다. 이제 패스트푸드점 감자튀김에도, 휴게소

에서 파는 알감자에도 유전자변형 감자가 들어온다. 김재식 씨는 “만약 농산물 수입이 끊기면 한국은 일주일도 못 버틸 것”이라며 “토종을 알고 씨앗을 지킬 의무는 당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겨울이면 씨앗을 종이봉투에 넣고, 습기 차지 않게 처마 밑에 대롱대롱 걸어두던 풍경. 김재식·정보희 씨에 의해 씨앗은 아직 잊히지 않았다. 이제 생명을 불어넣을 차례다. 그건 분명히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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