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흥 흔적 찾기

by 월간옥이네

독립투쟁을 따라 걷다

옥천 속 범재 김규흥


이 인물에 관해 묻기만 하면 다들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무대 뒤편에서 거의 모든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그를 이제야 알았다니. 동북아시아 역사의 중심에 서있던 그에 관한 기록이 이것뿐이라니. 일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놀랍도록 빠르게 퍼진 3·1 운동이, 민주화 열망이 그로부터 시작됐다니. 이 모든 놀라움은 1872년 옥천읍 문정리 문향헌에서 부유한 청풍 김씨 자손으로 태어나 사비를 털어 사립창명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세우고, 중국을 무대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펼친 범재 김규흥 선생을 가리킨다. 연구자들은 김규흥 선생의 연대와 무장투쟁이 그동안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조명하지 않았던 부분이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록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니, 어쩌면 교과서를 바꿀지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핍박받는 동포를 구하고자 몸 낮춰 투쟁한 김규흥이 세상에 드러날수록 우리는 비장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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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향헌에서 태어나다
문향헌은 옥천읍 문정리 춘추민속관 안에 있는 옛 고택이다. 250여년 전 범재 김규흥의 5대조인 정언 김치신공이 세운 자택으로, 원래는 기와집 85칸과 초가집 12칸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이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았다.
1872년 6월 13일 문향헌에서 범재 김규흥 선생이 태어난다. 김규흥 선생은 할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학문을 익히고, 문향헌을 뛰놀며 자란다. ‘읍내로 임한 시냇물이 흐르고 쳐다보면 송목이며 추목 등이 울창함을 의지하고 있어 아주 그윽한 정취가 있’는 곳, ‘뜰이며 밭둑에 매화를 심고 연못에는 연을 심어 그 집 이름을 문향헌이라 하여 즐기며 무엇 하나 거리낌 없이 지냈’1)던 곳. 마당에 우뚝 선 회화나무가 정취를 더하는 문향헌은 지난 250년 모진 세월을 견뎌 더 깊은 아름다움을 품은지도 몰랐다.
길을 안내하는 김상승 씨가 문향헌의 모진 세월을 이야기한다. 김상승 씨는 청풍김씨 집안 자손이자 김규흥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
“청풍김씨 집안이 노론 핵심 집안으로 재산이 많았어요. 어느 날 고종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옥천에 머물다 떠나는데, 2만 냥을 달라는 걸 주지 않아 이후 경복궁을 복원하는 데 엄청난 세금을 내야 했죠.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돈을 지키기 위한 포수가 30명이 오고, 엽전이 지붕 높이로 쌓여 나갔다고 해요.”
이때 가세가 기울었는데, 이후 김규흥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집과 땅을 팔며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고. 어릴 적 배 곪으며 자란 김상승 씨는 증조할아버지 김규흥에게 좋은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인 유년기에는 증조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1998년 김규흥 선생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을 때까지도 그랬다. 2013년 KBS에서 방영한 <독립운동의 숨은 대부, 김규흥>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김규흥 선생은 독립 역사를 기획하고 실행한, 그냥 묻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인물이 태어난 문향헌 역시 더 제대로 보존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김상승 씨는 오랫동안 문향헌을 바라본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집을 지으려던 게 문향헌이에요. 나무 때문에 철도가 깔린 경상북도 봉화 춘향면에서 나는 춘향목을 썼죠. 당시 궁궐 지을 때 많이 쓰던 나무가 춘향목이에요. 역사나 건축에 가치가 있는 고택인데 그만큼 관리되지 않는 게 안타깝죠.”
1) 김규흥 평전 (김상구 지음,2018) 청풍김씨 가승문향헌 유래중


2. 옥천에 남은 김규흥
문향헌에서 죽향초등학교는 걸어서 5분 남짓한 거리다. 죽향초에 가까워지자 벌써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애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뛰어 노는 운동장은 1905년 전 온통 목화밭이었다. 김규흥 선생이 목화밭을 기증하고 100원을 헌납해 사립 창명학교를 설립하며 학교 꼴을 갖춘다. 창명학교는 옥천 최초 공립학교인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9세기 말 일제가 잠식해 들어오는 조선에서 정부는 힘을 못 썼다. 정부는 재정 형편 상 교육시설에 투자하지 못하고, 일제는 통감부2)를 설치해 식민지 교육을 펼친다. 이 시기 나라 기반을 든든히 다지려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이들이 전국에 사립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외국어 교육에 특화한 서울 중교의숙에서 교사를 하던 김규흥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1901년 종교의숙을 그만둔 김규흥 선생은 1905년 8월 진명학교(이후 창명학교로 이름이 바뀐다)를 설립한다. 이후 재정난을 겪던 창명학교는 1910년 7월 30일 공립옥천보통학교로 바뀐다.
죽향초 역사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구 교사를 지나 김규흥 기념비 앞에 선다. 올해 10월 2일 세워진 김규흥 기념비는 죽향초등학교 뿌리 찾기 일환으로 진행됐다. 횃불을 형상화한 기념비 앞쪽에는 학교 설립과 가장 가까운 모습의 김규흥 선생 사진과 행적이 새겨져 있다. 뒤쪽에는 김규흥기념사업회, 옥천문화원, 죽향초등학교, 운영위원회, 학부모회, 죽향초총동문회로 구성된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와 건립비를 모은사람들 이름을 써넣었다. 글은 옥천신문 이안재 상임이사가, 글씨는 시인이자 서예가 김성장 씨가, 조각은 한남대 김성용 교수가 맡았다. 김규흥 선생이 1908년 경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옥천에 남긴 흔적을 후세가 더 진하게 새긴 셈이다.
2) 일제가 한국을 완전 병탄할 목적으로 설치한 감독기관


3. 청풍정에서 쉬어가리
정신없이 연달아 달리다 보면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김규흥 선생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고종의 밀지를 받아 상해 무관 학교 설립을 시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무장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연대하는 힘으로 독립하고자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한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은행을 설립하는가 하면, 낮에는 농사짓고 전쟁시에 싸우는 둔전병제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면에서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군북면 석호리 청풍정은 범재 김규흥의 삶과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청풍정은 청풍 김씨 선조 김종경이 지은 정자다. 죽향초를 빠져나와 옛 37번 국도를 타고 군북면 석호리 표지판을 따라 꼬불거리는 길을 더 들어가면 선물 같은 청풍정이 나온다. 지금처럼 이동이 간편하지 않은 조선 후기에도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청풍정에 풍류를 즐기러 갔다는 게 김상승 씨 말. 조선 근대화를 목표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 유배당한 곳이기도 하다.
정자에 세워진 안내판은 1980년 대청호 수몰 이전 청풍정은 ‘천하절경’이었으며 현재 정자는 1993년 옥천군에서 복원한 것이라고 알려준다. 마음을 훤하게 뚫어주었던 천하절경이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대청호에 반사된 해로 반짝이는 지금의 청풍정도 충분히 마음을 벅차게 한다. 석호리로 산책온 오승현(67, 군북면 소정리) 씨 말로는 여름이면 정자 옆 사유지에 심겨진 백일홍 나무에서 예쁜 꽃이 핀다는데, 여름청풍정은 또 어떤 풍경을 할까. 김규흥 개인의 삶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창명학교 설립, 흥선대원군의 원납전 등으로 이미 기운 가세에 독립운동을 더한 삶. 남은 문향헌 마저 팔아 독립에 보탠 삶. 배후에서 활동하며 기록되지 않은 삶. 우리는 역사에서 그를 잊고 지냈다. 청풍정에서 한가로운 시간이 지난다. 김규흥 선생은 더 많은 동포에게 평화롭고 한가로운 시간을 전하려고 싸운 것은 아닌가.


4. 당신께 전하는 말
대전 현충원에서 김규흥 선생 묘소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민원안내실에서 찾으려는 이름을 말하면 묘소 위치를 설명해준다. 애국지사3묘역, 250번에 있는 김규흥 선생 묘소로 향한다. 김규흥 선생은 1936년 8월 16일 중국 천진에서 임종을 맞는다. 아들과 조카, 이웃사람 몇명뿐인 외로운 죽음이었다. 후손들은 옥천읍 하계리 선산에 안장했던 묘소를 대전 현충원으로 옮기고, 매년 10월 1일을 추모일로 삼는다. 집안 가족들이 모여 김규흥 선생을 기린다. 김상승 이사장은 집안 어린 아이들에게 김규흥 선생의 독립운동을 설명해준다. 아이들이 뭐라고 답하느냐 묻자 어려서 ‘아직 잘 모른다’며 웃는다. 기존 독립운동 역사학 정론을 깨고 싶지 않아서, 또는 자료가 부족해서 연구되지 않았던 김규흥 선생은 올해부터 더 구체적인 형상을 띄고 세상에 드러난다. 김규흥기념사업회는 작년 한 해 죽향초에 김규흥 선생 기념비를 세우고, 연구의 토대가 될 평전을 출간했으니 올해는 홈페이지를 구축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 평전을, 내후년에는 만화 평전을 제작하려고 계획한다. 옥천향토사연구회와 함께 독립운동가 기념관설립도 조금씩 이야기하고 있다.

“김규흥 선생 말고도 옥천에 독립운동가가 많다고 해요. 하계리 동성교회 뒤편 청풍김씨 땅 5천 평을 시사해 독립기념관을 지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옥천향토사연구회 이재하 회장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저희도 김규흥 선생을 뒤늦게 알았어요. 주로 중국에서 활동해 자료가 없고, 집안에서는 거리를 두던 사람이었죠. 이제라도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명성을 높이고, 후손의 자긍심도 키워야 해요. 광장에는 유명한 이원 묘목을 심어 울창하게 키우고, 김규흥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 역사관을 볼 수 있게 하면 좋은 쉼터이자 교육장이 될 것 같아요.” 이런 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너른 묘역 너머 하늘이 따뜻한 주황빛으로 물든다.



월간 옥이네 VOL.19
2019년 1월호
글 사진 김예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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