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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 Jul 19. 2020

나 자신이 점점 작아짐을 느낄 때 <그래봤자 개구리>

마음에 불을 켜야 할 때는 언제인가

  몇 살이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 때였던 것 같다. 학교 뒤, 산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미나리이 나다. 더 들어가면 한지공장이 있었다. 미나리 옆에는 집이 있사이에는 리어카가 다닐 정도의 길이 있다. 지금은 아파트로 뒤덮여 있지만 말이다. 그때도 호기심이 많았는지 학교 뒤편에 뭐가 있나 궁금했다.

  햇살이 좋았다. 항상 단짝 친구와 같이 다녔는데 그 날은 혼자였다. 미나리옆을 걸었다. 초등학 중, 고학년 정도 되는 사내아이 두 셋이서 웃으며 뭔가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는 앉아서 땅 위에 있는 뭔가를 계속 손질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여러 개의 쇠꼬챙이에 끼워놓은 개구리였다. 생명체를 꽂아놓다니 처음 보는 광경에 적잖이 놀랐다. 그러면서 내색을 못했다. 그 아이들에게 내가 이질적으로 비칠까 봐 신경이 쓰였.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학교 주변 탐색을 포기하고 되돌아오려고 몸을 돌렸다.

  “야!” 남자아이가 나를 불러 세웠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빠르게 도망갈까 하다가 잘못도 없는데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이거 가져!” 남자아이가 나에게 내민 것은 개구리 한 꼬챙이다.

  어릴 적 개구리에 대한 일과 중학교 생물시간, 에탄올에 취한 개구리 해부하  개구리는 나 즐겁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거였다.

  개구리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 것은 TV 애니메이션 ‘개구리 왕눈이’ 주인공 왕눈이 아롬이를 통해서였다. 성우들이 느낌 있게 해선지 개구리들이 마음에 와 닿았고 귀여운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계기로 환경 정리할 때 여름이면 연잎과 개구리를 만들어서 게시판에 붙여놓기도 했다. 연꽃 축제에서 돌확 위 연잎을 오고 가던 연두색 개구리는 작고 귀여웠다. 집에 와서 개구리 종류를 컴퓨터로 찾아보곤 했다.



  등교 개학한 지 두어 달이 되었다. 1학년 아이들에게 자음과 모음, 받침 있는 글자를 가르쳤다. 문장을 만들어 보며 글 읽기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아이들 중에는 글을 잘 읽는 아이도 있고 터덕이는 아이도 있다. 나름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었고 편안한지 점점 자신을 드러냈다. 아이의 장점과 더불어 단점도 두드러다. 어떤 날은  용기 없이 숨기만 하는 모습확실히 보여주었다. 친구과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는 날도 간혹 생겼다. 이런 모습들 아이들을 더욱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그래 봤자 개구리>를 읽어주었다. 마음속에 드리운 어둠이란 장막을 걷어내고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이야기와 그림의 의미가 다가오지 않은 듯 아이들은 처음에 반응이 없었다. 그림책을 읽으며 나만 감동받은 듯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흰색 바탕에 그림이 있고 색상도 간결했다. 글자가 많지 않고 대신 그림이 많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일까.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누군지. 나는 언제쯤 날 수 있을까.' 이런 글에서 린 올챙이성장에 대한 렘과 두려움, 혼돈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어서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러했다. 나이를 빨리 먹으려고 떡국도 두 그릇씩 먹었다. 어른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편으론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나의 모습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그래, 지금이야’라고 읽는 부분에선 면의 힘이 느껴졌다. 구리로 성장하여 도약하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그러하듯 다 컸다고 끝난 게 아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  개구리 새, 뱀, 족제비에게 잡아먹힐 뻔한 일을 맞닥트린다. 친구들이 당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래 봤자 개구리’라고 움츠러다. 세상이 두려워 거대한 수풀 속에웅크리고 있다. 눈만 꿈벅꿈벅, 어둠이 짓누르는 것 같다.




 '내 안의 불을 밝힐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이 울적해지고 어두워지려 하면 불을 켜면 된다시바무라 에미코는 말했다. 이럴수록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좋아',  '신나' 같은 밝은 말을 한다. 기분이 좋을 때 표현을 하면 기쁨이 더욱 배가 되어 좋다. 그런데 살면서 우리가 정작 힘이 필요할 때는 언제인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다. 기분이 한없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렁 같은 곳으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이때 우리는 불을 켜지 않고 어려움 속에 가만히 파묻혀 있다. 둠에 몸을 맡기고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림을 보면 개구리 몸도 마음을 대변한 듯 배경에 비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위축된 자아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나 개구리다!'


  '자존감'이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구리가 큰소리로 외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이후 제 소리를 내며 활발하게 자기 소리를 내며 지다. 비로소 두려움과 어둠에서 벗어나 온전한 개구리 자신이 되었다. 


  개구리처럼 우리 반 아이들과 나도 그러길 바랐다. 개구리 소리 내기 활동을 했다. 실제 개구리울음과 흡사해서 깜짝 놀랐다. 사람의 탈을 쓴 왕개구리들이 의자에 앉아있는 줄 잠깐 착각했을 정도였다.


  아이들에게 ‘그래! 나 개구리다.!’를 외쳐보며 힘들 때도 용기 있게 지내자고 하였다. 아이들이 큰소리로 ‘그래! 나 개구리다.!’ 개구리처럼 입을 크게 벌리며 외쳤다. 자신감이 생긴 목소리였다.  이번엔 '개구리'라는 단어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해보자고 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다 같이 외치고 다음엔 한 명씩 하였다. 혜선이 차례가 되었다. 혜선이가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요라고 하였다. 의견을 받아들였다. 혜선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학생들만 하였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개구리처럼 두려움을 이겨내고 우리 항상 씩씩하게 생활하자!” 하였다. 이러면 끝이었다. 혜선이가  큰소리로 “선생님, 전 안 씩씩해요!” 하는 게 아닌가.


  혜선이와 말을 주고받았다. 집에서 공부할 때 오빠가 자신의 등을 때린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자신은 생각을 할 수도 없고 말도 못 한다는 거였다. 학교에서도 자신의 모습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교실에도 오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지난번 사진 찍을 때 네가 끝까지 안 찍는다 했잖아. 그때도 오빠가 옆에 있어서 얼어붙었냐?" 재민이가 물었다. 지난번  혜선이가 단체사진을 안 찍는다고 했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 모습과 연관시키는 재민이의 질문에 웃음이 났다. 혜선이의 답변이 궁금했다. 그때는 사진 찍기 싫고 말했다. 마음의 기복이 큰 아이였다.


  반 회장 역할을 잘하고 있으며 큰마음을 가진 아이라고 생각데 정작 자신은 작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내가 혜선이에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크게 생각해야 행동이 그렇게 나오고 남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잘하는 것을 보니  선생님이 잘 봤다며 역시 생각주머니가 크다고 했다. 삐져나온 이마의 머리카락을 뒤로 계속 쓸어 올려 주다. 오빠 이야기를 한참 해선지 열 받은 듯 이마가 따끈했다.


  자생그(자꾸 생각나는 그림)를 말했다. 종민이가 맨 뒷장 그림을 가리키며 “개구리가 귀여워요.” 말했다. 뒷다리가 살짝 나온 부분을 지목하던 해주는 “가까이서 보니까 뒷다리가 있네요.” 했다. “그것까지 보다니 해주, 넌 관찰력이 뛰어나구나!”라고 내가 말했다.


  “선생님, 다른 사람들은 빗방울을 못 보는데 저에게는 보인다요.” 혜선이가 불쑥 말했다.

  “빗방울? 혜선아,  봐! 넌 생각을 잘하고 관찰력도 이렇게 좋잖아! 말도 잘하고 생각을 여러 가지로 잘해. 신감을 가지고 씩씩하생활하자! 우리 모두는 고귀한 존재야.”라고 말했다.

  “고기요?”라고 혜선이가 묻는 말에 “냠냠 먹는 맛난 고기 말고 고·귀! 아주 귀하단 뜻이야.” 했다. 혜선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여러분, 우리 용기 있는 개구리가 되자.”

  “선생님, 용기 있는 개구리 말고 사람이 되자고 해야지요.” 혜선이가 웃으며 대꾸했다.

  “너희들을 개구리로 비유한 거야.” 


  이제야 그림책 읽기 시간이 끝났다. 아이들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들과 내가 어두워지려 할 때 개구리처럼 마음의 불을 켤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래봤자'라는 힘빠지는 말 말고 '그래'라는 긍정언어를 많이 쓰면 좋겠다. 글자는 비슷하지만 나에게 주는 힘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

텃밭 고구마잎에 앉아있던 청개구리가 귀엽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선생님 개구리 들어왔어요 했다. 잡아서 흙이 많은곳에 놔줬다. 손톱만하다. 작아서 다행이었다.

-----이제껏 나 자신을 개구리라고만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누군가에게는 내가  때에 따라서 새나, 뱀, 족제비와도 같은 존재가 된 적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때의 미안함을 담아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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