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마 Aug 07. 2020

나룻배를 보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림책을 보고 나를 보다 <스티나의 여름> 레나 안데르손 글. 그림


자꾸 눈길이 가는 책이 있었다. 어린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할아버지와 손녀의 여름날 지냈던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나를 끌어당기는 요소들이 많이 있었다. 가령 할아버지와 나룻배 같은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열일곱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바느질과 음식 만들기 등에 솜씨가 있고 인정이 많은 분이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울 때면 우리를 데리고 외할머니 동생인 이모할머니 댁에 가곤 했다. 이모할머니 가족은 우리 가족을 한없이 따뜻하게 품어주셨다.


외할아버지는 강가 외딴 마을에서 혼자 사셨다.  지금은 찻길이 나 있지만 그땐 배를 타고 들어갔다. 배 안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통통통 뱃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물을 바라보았다. 시퍼런 물속을 바라보며 배가 전복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 당시에는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다. 저마다 생필품을 사 와서 배안에는 짐과 사람들로 빼곡했다.


 뉴스에서는 이 곳에서 배 사고가 나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몇 명 생겼다는 소식이 잊어버릴 만하면 나왔다. 배 안에서 어른들이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사고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사람들이 불쌍했고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사고를 맞을까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기괴한 바위 모양이나 산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 등이 시야에 들어오면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을 두려움이 막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이끄는 할아버지 집에 가는 길은 멀미를 감수하고라도 가고 싶은 여행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1시간여 달려가다 보면 몸이 안좋았다. 그때 창밖 다양한 집의 형태와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멀미로 누렇게 뜬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메슥거림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배표를 사고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 시간은  좋았다. 멀리 있는 섬 풍경을 보기도 하고 '하드'라고 하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 먹기도 했다. 사진기사에게 부탁하여 기념사진을 찍을 때있다. 그 사람은 포토 포인트에서 찍은 사진을 목에 걸고 다녔다. 할아버지 집에 가는 길은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과 같았다. 위험이 도처에 도사려 있지만 신나는 일이 한없이 벌어질 것 같은 세계로 가는 일종의 '문' 같은 것이었다.


<스티나의 여름> 겉표지에는 회색 오두막집이 있고 바로 옆에는 바다가 있다. 머리며 옷이 자유분방하게 생긴 여자아이와 안경 낀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지붕에 앉은 새와 눈을 맞추고 있다. 한 손에 빵이 있고 나머지 으로 나이프를 쥔 채 버터를 푸려는 몸짓을 하고 있다. 음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새들이 계속 날아왔다. 집 옆면에는 집에서 화초를 키웠는지 물조리개와 양동이도 있다. 창문 안으로 보이는 테이블에는 꽃이 있다.


'물건들은 누군가가 자기를 발견해주기를 기다린다.'


스티나의 물건들을 보는 관점이 사랑스럽다. 스티나는 여름이면 섬에 사는 할아버지 집에 간다. 주변을 매일 쏘다니다가 바닷가에 가서 물에 떠내려오는 것들을 집어온다. 섬의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걸 들여다 보고, 쓸모 있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스티나에게 제일 설레는 시간은 배를 타고 할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나가서 그물에 걸린 고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법상자처럼 기대를 가지고 그물을 들춰보면, 고기가 가득 있을 때도 있고 먹을 수 없는 해초들로만 채워져 있을 때도 있다. 운이 좋은 날이면 농어와 넙치, 가자미가 잡힌다. 스티나는 저녁으로 농어를 먹고 싶어 한다. 버터로 구운 신선한 농어, 초록 파슬리, 포슬포슬한 감자를 먹는다. 완벽한 저녁이다. 이 부분을 읽으니 겉표지 그림은 저녁을 먹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나룻배를 한 척 가지고 있었다. 보통 혼자 고기를 잡으러 가셨는데 어느 날은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배에 탄 적도 있었다. 색이 칠해지지 않은,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배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고기를 조금 잡은 날도 있고 많이 잡은 날도 있었는데 고기를 어느 정도 많이 잡은 날에는 양동이에 하나 가득 담아왔다. 어가 많았다. 찜이나 회무침을 해 먹었다.


저녁식사 후, 스티나는 폭풍우가 온다는 말을 듣고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나갔다. 스티나가 침대에 없는 것을 알고 할아버지가 스티나를 찾으러 갔다. 날씨가 무섭고 거칠었다. 바위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스티나를 발견했다. "우리 스티나 공주님. 이렇게 폭풍이 치는 밤에 혼자 바위틈에 앉아 있는 것은 썩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구나." 하며 껴안았다. 그리고 " 비에 몽땅 젖었으니 일단 집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라며 폭풍우 구경이 다시 시작될 거라는 것을 암시했다.


 날씨가 사나울 때는 항상 둘이 붙어 다녀야 하고 옷도 잘 챙겨 입어서 폭풍이 와도 두렵지 않은 거라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우비와 장화를 꺼내 준다. 그리고는 스티나와 함께 폭풍우를 보러 갔다. 이 장면에서 아이가 두려움에 빠졌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에게 안심을 시켜주며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을 차곡차곡 알려주는 할아버지의 지혜에 반했다.  


외할아버지를 생각할 때 여러 가지 좋은 추억이 있지만 껄끄러운 것도 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집에 오셨을 때다. 한창 친구를 좋아할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나고 조금 늦게 집에 돌아왔다.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화를 내진 않았지만 씨름에서 상대 선수를 넘기듯이 나를 메다꽂았다. 밖에서 놀다가 늦게 와서 미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막 방에 들어왔을 때였다. 사춘기였고 누가 나를 그렇게 한다는 것에 놀랐다.


나를 때리거나 혼을 낸 건 아니었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껄껄 호탕하게 웃고 뭐라 뭐라 말하며 나를 업어치기 비슷하게 했는데 다른 가족들은 웃고만 있었다. 나만 기분이 이상한 상태라서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방인 같았다. 그때를 떠올려 보며 '거기서 솔직히 기분 나쁘다고 말을 했어야 했나.'라는 생각과 그때의 안 좋았던 기분이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스티나의 여름>이라는 책을 보며 할아버지와 추억을 되새겼다. 친척들은 할아버지가 나를 많이 예뻐했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있었던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해결되지 않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앙금이 글의 방향을 이렇게 틀었다.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아보여도 괜찮을 거라고 속단하면 안된다. 감정표현이 미숙하지만 이미 음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다. 동등하지 못한 관계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표현을 못 한다. 그러니 사람을 대할 땐 특히 표현력이 없고 여린 이를 대할 땐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관계란 상대와 관계된 어떤 상황에서 감정이 명료하게 이름 붙여져야 하고 수긍이 되어야 하나보다. 그렇게 크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는데 실망감과 창피함, 당혹스러움, 표현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있었다. 내 몸도 내가 감당을 못하고 있던 때에 누가 내 몸을 업어치기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친절하다고 생각하고 줄곧 관계를 잘 맺어온 할아버지가 그랬으니 더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따질 주변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상황도 아니었다.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해피한 상태였던 것이다. 내 감정이 맞는지 확신을 하지 못하며 소심하게 반응하고 예의 바른 작은 여자아이였다.


그 뒤로 할아버지를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조그만 일이 그때까지 쌓아온 관계를 무너뜨린 것이다. 내가 너무 어렸던 이유일 수도 있었다. 이 그림책을 보고 나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다시 그때의 기분과 만나게 되었다. 레나 안데르손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마음속에서 오래 똬리를 틀고 있었던 불쾌했던 감정을 정리할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감정이란 것은 신기하다. 묻히고 잊고 있어서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계기로 실타래 풀리듯 쭉쭉 풀어 나온다. 억눌러져 있던 감정이 자신은 죽은 것이 아니고 납작 엎드려왔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제는 그 감정과 화해하고 납득시켜주고 싶다. 할아버지는 백가지 잘하고 한 가지만 서운하게 한 것이다. 그것을 크게 생각하여 홀로 상처 받고 이제껏 마음에 담아온 것이다. 할아버지가 나를 아끼고 얼마나 살뜰하게 챙겨주셨는지를 생각하고 싶다. 할아버지도 표현은 안 했지만 미안함을 가지셨을 것이다.   


스티나는 물에 떠내려온 서랍장을 발견하고 거기에 그동안 주워왔던 것을 정리해서 할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여태껏 주워 모은 잡동사니를 깔끔하게 정리했다며 할아버지가 감탄했다. 서랍장 안에는 인형, 깃털, 전구 등이 있었다. 큰 공간엔 큰 물건을 작은 곳엔 작은 것을 요령 있게 정리했다. 그럴싸했다.


"가끔은 폭풍이 오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스티나의 긍정적인 말이 울림 있게 다가왔다. 고통과 고난은 한 인간이 우뚝 설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이자 축복이라고 한다. 이것이 있음으로 평상시엔 흘려보냈던 고마움과 사랑을 알게 한다. 스티나는 폭풍을 통해 몇 가지를 얻었다.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어둡고 거친 날씨가 두렵고 위험한 상황이어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울먹일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을 찾아온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꼈고 폭풍이 올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거센 폭풍우가 지나간 후 햇살과 바람이 다디달게 느껴졌을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폭풍이 오기도 하고 햇살이 밝게 빛을 내며 세상이 내 것인 양 느끼게도 한다. 때로는 부드러운 바람이 강팍해진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폭풍우가 온 다음에는 형태는 다르지만 수납하기 좋은 서랍장처럼 얻는 것이 있다. 폭풍우 속에서 자신을 놓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정면으로 맞선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용기가 나에게 필요할 때 , 찾아와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