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 소망이가 죽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임을 당했다. 그는 안락사(존엄사)되었는데 그건 그의 선택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그러한 의사를 밝힌 적이 없으므로 엄격히 말해 난 그가 당했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와 더 충분히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면! 역시나 나의 게으름과 이기심을 질타하는 수밖에.
살해의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간단했다. 고요한 수술실의 군청색 수술대 위에 누운 채 가까스로 숨을 이어가고 있던 그를 보내는 데 새끼 손가락 만한 작은 주사기 두 개면 충분했다. 의사는 친절하게도 두 주사의 각기 다른 용도를 설명해주었다. 이미 옅어져 있던 그의 심장은 마취용인 첫 번째 주사로도 사실상 멎고 말았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다행인지 그간 우리는 울음을 나눠서 갚아왔기 때문이었다. 소망이는 수개월을 앓았고 그 기간이 우리에겐 슬픔의 분할 납부 기간이었다.
소망이는 흰 상자에 담겨 나왔다.
그것은 지나칠 정도로 무성의했다. 난 아주 난감하였다.
소망이는 흰 상자에 담겨 나왔다.
난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그 사고실험에 따르면 상자에 담긴 고양이는 상자를 열기 전까진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망이는?
물론 난 소망이가 죽는 것을 지켜봤지만 그럼에도 상자는 열어보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그 “중첩” 상태를 영원히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언제나 인간과 사회에는 기억량과 망각량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우린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선 무언가를 잊어야 하고, 무언가를 잊기 위해선 무언가를 기억해야만 한다. 어느 쪽이든 값을 치뤄야만 대가를 얻을 수 있다. 그건 내가 아는 세상의 원리다. 따라서 우린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지를 잘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걸 기억하기 위해선 망각에게 미끼를 던져주어야 한다. 소망이를 기억하기 위해 난 어떤 미끼를 사용해야 할까.
슈뢰딩거의 소망이.
난 그에 관한 기억을 다섯 개의 감각으로 재구성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기 위한 다섯 개의 미끼를 찾아보기로 했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