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의 첫 주 금요일 저녁. 코 끝이 시려울만큼 한창 겨울인 때, 우리는 겨울 추위를 뚫고 영등포역 1번 출구 앞 단란한 중국집에 모였다. 퇴근하고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주말을 시작하는 시간. 꽤나 시끌벅적할 시간대였으므로 모인 사람끼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룸식당으로 예약했다. 이 날은 내가 오래 알고 지낸 대학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나눠주는 날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해 직원에게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서자 황금으로 장식된 현란한 중국식 인테리어가 나를 반겼다. 추위가 잔뜩 묻은 외투를 벗어 걸어두고는 식탁에 앉아 호기롭게 메뉴판을 펼쳐 들자, 갖가지 먹음직스런 메뉴들이 저마다 자신을 주문해달라며 이름을 뽐내고 있었다. 어디보자. 이 집은 특이한 탕수육이 있네? 그렇다면 이 녀석을 꼭 먹어줘야겠구만. 그렇게 아주 고심 고심한 끝에 몇가지 메뉴를 주문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기다리자 하나 둘 씩 반가운 얼굴들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 왔어? 오랜만이야! 웃음띤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래전부터 나와 인연을 함께 한,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봐도 좋고, 언제라도 늘 반가운. 이 모임에 오빠들은 자그마치 넷이고, 나와 동갑인 여성 친구가 한 명 있다. 작년 가을을 마지막으로 오빠들은 모두 빼어난 외모의 아내를 한 명씩 꿰찼으며 몇 몇은 귀여운 자식도 낳았다. 덕분에 이제는 자주 보진 못하지만 그래도 늘 마음만은 가까이에 있는 존재들. 차차 커다란 식탁의 자리가 다 채워졌고, 한 상 가득 음식도 모두 나왔다. 그제야 우리가 머문 공간이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자 이제 모두 모였으니까 소개할게. 나와 결혼할 민석이야."
남자친구를 소개했다. 여기는 민우오빠고, 여기는 지현오빠야. 여기는 내 친구 지수. 한명씩 돌려가며 소개를 마치자 멋쩍고 어색한 인사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때마다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서 였는지 아님 그냥 인사치레였는지 '결혼 축하합니다.' 라는 축하 인사가 돌아왔다.
처음엔 약간 서먹한 듯, 그러나 실은 꽤나 사교적인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오빠의 아내들을 소개 받을 때 처럼) 금새 하하호호 웃으며 같이 술 잔을 나눴다. 아주 맛있는 음식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고, 역시나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술을 넘기고, 음식을 넘기고, 마음을 넘기는 따스한 시간들. 상상했던 딱 그대로의 안온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다시 짠, 짠! 계속해서 잔을 부딪힐 때마다 친구들의 입에서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해.”라는 말이 이어졌다.
참 감사한 말이다. 감사한 마음이고. 그런 한 편, 나는 못내 같은 자리에서 몇 번씩이나 거듭 축하를 받는 것이 좀 어색해서 순간 '결혼이 뭐길래 이토록 축하를 받는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마지막 축하를 받은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지난 내 생일이었을까. 옛날에는 뭐만해도 곧잘 축하받는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어느샌가 나이를 먹으면서부터 축하 받는 일이 줄어든 것만 같다. 어제와 다를거 없는 여전하고 여전한 하루이기 때문이려나. 그럼에도 나는 별 일 없이 지나가는 무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생일, 입학, 졸업, 취업, 진급, 임신, 출산 등.. 인생의 수많은 경사 중에서도 결혼은 특히나 빠질 수 없는 경사다. 그래. 인륜지대사니까. 그래서 나도 '결혼' (이제껏 결혼한 수많은 사람들을) 축하는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축하하는지 정확히 콕 집어 말해보라 하면... 음 글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입을 옴짝달싹하게 될 것만 같다. 그러니까 말야. 아마도 '결혼'이란 걸 하게 된 것? 아님 인생의 숙제를 하나 끝낸 것? 어쩌면 부모에게서 독립하게 된 것? 아니면… 아, 알겠다.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가 생긴 것? 그렇지. 부부가 된 것.
그건가보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사람과 내가 부부가 됨을 축하하는 그런 축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는건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니까. 암, 그렇고 말고. 건너앉은 사람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마음도 함께 따라 채웠다. 그리고 그 잔을 모아 부딪힐 때마다 반복되는 축하를 받으며 나 역시 고맙단 말을 되풀이 했다. 고마워. 축하해줘서 고마워.
기꺼이 축하받으니 좋긴 한데, 사실 결혼이란 행사는 내가 살아오면서 들인 어떤 노력에 비해서도 가장 간편하고 당연했다. 혼기가 찬 나이에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연인과 배우자가 되는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고, 결혼을 준비하며 지금껏 다툼 한 번 없이 결혼의 문턱 앞에 서게 된 것은 나의 부단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감사해 마땅한 일이었으니까.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제철이 되면 누가 말하거나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꽃들이 피어난다. 봄이 오면 저절로 벚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내겐 이 결혼이 그랬다. 결혼을 약속한 뒤 눈 감았다 뜨니 여기까지 와있더라는. 그정도로 당연하고 쉬운 일. 이런 일을 모두에게 찐하게 축하받으니 좀 의아했나보다. 나의 수많은 땀과 시간을 쌓아 일구어 낸 수능 점수나, 졸업 작품이나, 자격증, 통장 잔액 뭐 그런 것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축하였으니까.
이쯤되니 이런 생각도 든다. 이제 내 남은 삶에 이보다 더 큰 축하를 받을 일이 있을까? 앞으로도 좋은 일이 많았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임신과 출산 말고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가히 결혼을 뛰어넘을 정도의 큰 축하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에 버금가는 정도?)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부모님의 먼 지인까지 모두 모여 우릴 축복해 주신다니. 새삼 결혼이 이렇게나 큰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렇긴 하다만 아마 나에겐 결혼보다는, 임신과 출산이 더 큰 감동이자 기쁨이 될 것 같다. 새로운 생명과 마주하는 일. 그것은 또 얼마나 신기하고 신비로운 경험일지… 기대가 돼. 조금 욕심을 내 결혼을 앞 둔 지금 이 기쁨에 이어 또 다른 기쁨(임신)과 더 큰 기쁨(출산)이 이어지는 결혼생활을 기다려본다.
푸짐한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기분 좋게 바라본 모두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새로운 시작을 앞 둔 한 커플을 바라보는 인애한 눈빛이었는지, 술에 오른 취기 때문이었는지, 혹은 내가 고심해 고른 메뉴들이 끝내주게 맛있어서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모쪼록 다들 행복해 보였다. 좋았으면 됐지. ‘그럼 이제 결혼식 날 보자. 준비마저 잘하고. 축하해.' 역시나 빠지지 않는 축하와 격려섞인 인사를 나누며 그 날 자리를 마쳤다. 코 끝 시린 계절이라 추위와 싸우며 집에 돌아가야했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느껴짐은 분명 훈훈한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언제나 축하 감사히 받겠습니다. 모두 감사해요. 그리고 나도 내 결혼을 축하해! 두 사람 행복하게 잘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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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코 앞인데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어보던 이들이 꽤 있었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알 것도 같지만, 난 늘 꿋꿋이 한결같이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평소랑 똑같아요.”
로맨틱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대답에 감동이 파괴당했을지 몰라도 난 정말 그랬다. 결혼이 뭐 대수라고- (대수긴 한데) 그러나 전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에겐 이토록 당연한 우리의 결말, 그리고 이토록 당연한 우리의 결혼.
결혼을 한다고 해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평소와 똑같다. 여전히 좋고, 평범한 날들의 연속이다. 오늘도 너와 내가 그 하루 속에 함께 있음에 감사할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