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별 탈 없이 하루를 마치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함께 따라오는 수치심에 이불을 걷어찬다. 떠오르고 만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 떠오르고 만 것이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지만 괜스레 이불에게 화풀이를 하고 만다. 그렇게라도 부정해보고 싶은 과거이자 이제 그만 잊혀졌으면 싶은 기억이다. 대부분 나의 바람처럼 달리 휘발되기는커녕 오래도록 자리를 잡는다. 방심하는 틈 사이에 불쑥 튀어나와 잊고 지냈는지 점검을 하러 오는 격이다.
그중에서는 사랑에 관한 기억은 늘 강렬하다. 짝사랑했던 사람이 사실은 나의 친구를 좋아했던 일. 나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던 옛 연인.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수없이 번복했던 무책임한 연애까지 정말 유치하고 짠내 나는 기억들이 가득하다. 뿐인가. 헤어지고 난 후로도 흑역사는 계속된다. 잘 마시도 못하는 술과 혼자서 씨름을 해서 다음날 골골거리는 건 기본이오. 슬픈 노래의 가사가 내 이야기 같아 계속 반복해서 부르다 못해 친구에게 전화해 밤새 신세 한탄했던 기억들. 기억을 지울 수 있다 해도, 무엇부터 지워야 할지 고를 수 있을까.
이 나이 먹도록 떠오르는 흑역사, 이불킥 메모리는 꼭 잊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우고도 지난날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테이프를 듣고도 다시 만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둘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리 본인의 목소리로 지난 연애를 부정한다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사랑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그들은 어쩌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지 않을까. 비슷한 문제 앞에서 둘은 다시 싸우게 되지 않을까.
되돌릴 수 없음으로 우리는 조금이나마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고통을 머금은 기억으로 지금을, 눈앞의 순간을 소중히 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성숙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 시간만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단단함으로 거듭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