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지수 Dec 27. 2021

어떤 다짐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보고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 지금 애인 말고, 다음 애인과 꼭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이 다짐은 내가 다음으로 만날 애인을 미리 정해두는 준비성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처음 봐서는 이 영화를 완전히 흡수하기 어려웠고, 그런데도 연출이나 어렴풋이 느껴지는 메시지가 좋았기 때문에 꼭 한번은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보고 싶었고, 그러자니 지금 애인은 이 영화를 함께 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애인이 왜 적합하지 않냐 물으신다면, 일단... 감수성이 부족하다. 짧지 않은 기간을 만나면서 애인과 영화관 데이트는 자주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일단 같이 영화를 보면 재미가 없다. 나는 모든 영화에 어떻게든 감동하는 사람인데, 게다가 그걸 나누고 싶어서 영화를 보고 나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인데 그런 내 옆에서 애인은 ‘영화가 말이 안 된다’부터 시작해서 이해가 안 간다, 억지다, 근데 주인공은 대체 왜 그러는 거냐 같은 말만 내뱉는다. 전형적인 F인간과 T인간이랄까. 게다가 이 영화는 타임라인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를 못 한 애인이 영화가 끝나면 건조한 표정으로 옆에서 눈물을 훔치는 나를 기이하게 바라볼 게 뻔하다. (영화관에서 같이 <듄>을 보던 순간, 압도된 나와는 달리 애인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던 당시의 나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애인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굳이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순수했던 언젠가를 되짚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연애라고 여기기엔 상냥하거나 부드럽지 못한 순간들로 인해 마음이 많이 지치다 못해 무뎌진 나는, 그래서 이 아름다운 영화를 당연히 지금의 애인과는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언젠가, 어쩌면 내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과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같이 눈물 흘리고 조잘조잘 영화의 내용에 대해 토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 같은 게 내겐 대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내게 아직도 시간이 많이 흐른 언젠가로 남아있다. 달라질 것 없이 매일을 살다 보면 애인마저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런 애인과 며칠 전엔 크게 다퉜는데, 이미 패턴까지 외우고 있는 고질적인 다툼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우기로 한 것처럼, 이 아이를 내 미래에서 지우기 위해 이별을 고했다. 철없는 연인의 떠보기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고 그런 나의 제안에, 우리는 이제 겨우겨우 작동하는 낡은 연인인지라, 애인이 너무나 당연히 동의할 줄 알았다.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지운 것을 알고 분노하며 본인도 기억을 지우려 한 조엘처럼.      


  예상과는 다르게 애인은 자신이 잘못했다며 내 제안을 거부했다. 완벽히 확신할 순 없지만 우린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거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몇 배로 더 노력할 거라고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진실로 아름다운 말이었다. 동시에 사실 우린 비슷한 말들을 이미 수없이 주고받았었단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는 과정을 겪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새롭고 뜨겁기만 한 사랑 안에서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나와 다시 해보자고 말하는 그 아이가 짠했다. 담담한 오케이와는 달리 처절한 그 아이의 대답들에 결국 나도 오케이 하고 말았다. 똑같은 트랙을 똑같이 돌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이터널 선샤인을 봤다. 내가 서운하다고 하면 대체 그게 왜 서운한 거냐고 되려 묻는 애인을, 두 번째 <이터널 선샤인>을 본 지금까지 만나고 있으니 이게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두 번 보았음에도 여전히 지금 애인과 보고 싶지는 않다. 처음 했던 다짐과 같은 이유로 말이다. 다만, 요즘 들어 내뱉어진 딱딱한 말들을 급히 수습하면서까지 공감과 이해로 날 어루만져주려 노력하는 애인의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는 걸 감안해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여전히 <이터널 선샤인>은 볼 때마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영화고, 그러므로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다시 볼 건데, 세 번째로 보고 나서는 내가 해왔던 다짐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