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목소리가 크다’
얼마 전 읽은 소설책에서 발견한 문구. 읽을 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지만 요즘 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른다. 요즘 각종 유튜브 영상들의 댓글을 보다 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싶다.
얼마 전, 한 가수가 예능에 출연한 유튜브 영상을 하나 보게 됐다. 20년 전의 초봉과 현재의 초봉, 그리고 그때의 집값과 요즘 집값의 변화 추이가 달라 청년들에겐 현실이 막막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20년 전 나는 초등학생에 불과했고 그래서 사실 그때의 대졸자 초봉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그 가수가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들었고 그렇다면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20년까지 갈 것도 없이 내가 기억하는 시간 동안만 생각해 봐도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는데 비해 ‘서울’ 집값은 무섭게 올랐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들여다본 댓글창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우선, 20년 전 초봉은 그 가수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 정도 초봉을 받았다니 어느 회사에서 일을 했던 거냐며 말도 안 된다는 댓글이 많았다. 그와 더불어 잘못된 정보로 괜한 민심만 선동하고 감정팔이를 한다는 비난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그때야말로 IMF 때문에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지금 젊은 세대가 하는 고생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며 ‘라떼는’을 시전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보였다. 어수선한 댓글들에 내 마음도 덩달아 시끄러워지는 듯해 댓글창을 닫았다.
일단, 팩트는 중요하다. 주장에 근거가 되는 팩트가 정확하지 않다면 그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진다. 단 하나의 정보가 부정확하다고 밝혀지는 순간, 나머지 모든 근거와 주장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의심만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만약 그 가수의 주장에 근거가 되는 20년 전 초봉에 대한 정보가 올바른 정보가 아니라면 우리 사회를 꼬집는 비판이 아닌 ‘잘못된 정보를 이용한 선동’이 되고 만다. 아무리 그 주장이 의미가 있는 발언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의견을 내세울 때는 흔히 말하는 팩트 체크가 필수이다.
그리고, 우리는 확실히, 혐오와 공감 결핍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 가수가 말하고자 했던 부분은 사회의 불균형으로 인해 현재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이었다. 근거가 되는 부분의 사실 정도 여부를 떠나 사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일반적인 청년들의 임금에 비해 집값은 터무니없이 높다는 것을. 그러니까, ‘현재’ 사회의 불균형으로 ‘현재’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보다 현재의 청년들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비교할 수 없다. 그때는 그때만의 어려움이 분명 있었고, 지금은 지금만의 어려움이 분명 있다. 지금의 청년들은 그때의 청년들의 어려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 당시 청년들이었던 사람들은 지금의 청년들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겪어보지 않으면 100% 똑같이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0년 전 청년들은 정말 어려운 시기를 보냈고, 그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청년들도 나름대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공감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다른 세대를, 다른 성별을, 다른 입장에서 한 번쯤 생각해 보려고 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아버지이고, 딸이며, 형제이고, 친구이다.
과연 나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시끄러운 댓글창 속에서도 누군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고생이 많다며 격려하기도 했고,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댓글창 너머에는 분명 조용하지만 분명 따스한 눈길이 있고 보듬어주는 손길이 있다. 단지 시끄러운 혐오의 목소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목소리가 크다고 그것이 다수가 아님을.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나라는 원래 어떤 나라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