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기 전 혹은 저녁을 먹고 나서 하는 샤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다. 하루 내내 내 몸과 마음에 쌓였던 먼지를 말끔히 씻어준다. 샤워부스를 뽀얗게 채우는 수증기에 둘러싸여 부드러운 비누 거품으로 온몸을 구석구석 닦고 따뜻한 물로 헹궈낸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물줄기의 느낌이 좋다. 비누거품이 물에 쓸려 내 몸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편안한 안도의 숨이 새어 나온다. 물리적으로는 몸을 씻는 행위이지만 나는 샤워를 통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에 더욱 집중하는 편이다.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우울은 수용성이다.’
그렇지만 샤워 시간이 항상 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오히려 샤워를 하는 동안 그동안 잠들어 있던 생각들이 모두 깨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누구에게도 재촉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라 그런 걸까. 낮동안 잊고 있었던 생각들,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파 한쪽으로 미뤄두었던 생각들, 이제는 아물었지만 큰 흉터를 남긴 상처 같은 일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를 부끄러운 일들. 감각에 집중함으로써 잡생각을 없앨 수 있다던데, 하며 물소리에 집중해보기도 하고 비누 향기를 한껏 들이마셔보기도 한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미 떠오른 생각들은 떼인 돈 받으러 온 빚쟁이들처럼 눌러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빚쟁이들이 원하는 건 결국 돈이다. 눌러붙어 앉아버린 생각들이 원하는 건 내 관심이다. 억지로 등을 떠밀어봤자 소용없는 일, 원하는 걸 주기로 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각각 다른 사연의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머리를 감는 동안 지난날 아픈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 맞아, 그때 많이 힘들었지. 누구라도 힘들었을 일이야, 네가 나약해서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인 걸.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지금 이렇게 웃는 너를 봐. 너는 씩씩하게 잘 이겨냈어. 대견해. 양치를 하는 동안 골치 아파 미뤄두었던 생각을 꺼내온다. 가벼운 물컵도 계속 들고 있으면 짐이 되고 팔이 아파지는 법이지. 복잡해 보여도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어, 조금씩 해결해 보자. 원하는 관심을 받아낸 생각들은 나를 떠나 거품과 함께 욕조 속 작은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내 마음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원하지 않는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면 밀어내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세상 만물의 이치인 건지, 억누를수록 더 강한 반발심으로 엉뚱하게 튀어 올라온다.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정적인 감정들이나 끝없이 미뤄 산처럼 쌓인 생각들 때문에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반갑지 않더라도 손님이 찾아온다면 돌려보내지 말고 그때그때 잘 대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늑한 샤워부스 속, 저녁의 샤워 시간에 찾아올지 모를 어떤 생각을 위해 나는 오늘도 부드러운 라벤더향 수증기를 채운다.
사진출처
Unsplash_Carson Master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