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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운 Sep 14. 2024

면접

불편해도 나로 살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 단어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지 않을까. 순탄히 살아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단어들 중 내 손에 꼽히는 영광을 누리는 단어들 중 하나는 ‘면접’이다. 면접은 사실 ’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취업 면접의 경우, (이상적으로는) 지원자와 회사가 서로를 알고 평가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그 평가는 그래야 하는 것과 달리 쌍방의 무게가 다르다. 특히 지금처럼 실업률이 높고 구직난이 계속될 경우 그 평가는 점점 일방적이게 된다. 즉, 지금 내가 느끼는 면접은 내가 ’ 평가당하는 ‘ 자리라는 것이다.


꼭 면접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든 내가 평가당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아주 편한 자리에서도 나의 옷차림, 나의 말투, 나의 지금까지의 경력, 나의 성격 등 어떤 측면으로든 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면 상당히 불편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면접은 그런 평가를 공식적으로 당하는 자리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에 힘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가를 당하는 것이 왜 기분이 나쁜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 것 같다. 너무 당연한 소리라 1+1=2를 뭐 이렇게 대단한 발견인 것처럼 썼지 싶겠지만, 앎과 깨우침의 차이에서 오는 기쁨에서 쓰는 것이니 세상에는 이렇게 단순한 것도 직접 찍어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구나 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겠다.


‘I am good enough (나는 충분해)’. 완벽주의에 대한 허상을 부수고, 이미 그 자체로도 부족함 없이 충분하다는 의미다. 나를 꽤 오랫동안 괴롭혔던 그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간간히 내 신경을 긁어대는 완벽주의란 녀석은 내가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것이 얼마나 덧없고 어리석은 것인지 알지 못했고, 나는 요즘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세상이 바라는 사람이 누구이고 그에 맞춰 스스로를 깎고 포장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나로서 존재하고 나만의 모양과 색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면접은, 그리고 그와 같은 세상의 수많은 평가는, ’ 기준‘ 이 있다. 당신이 얼마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색을 가졌고, 얼마나 절묘하고 기가 막힌 모양을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파랗게 보이는지, 얼마나 둥근 모양인지만의 기준으로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그 점수는 ’You are not good enough'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니까,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일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 작품일지라도, 당신은 ‘충분하지 않다’.


나의 모래성을 한 순간의 파도가 무너뜨린다. 거봐, 넌 힘이 없어. 결국 이렇게 휩쓸리고 말걸. 세상은 계속해서 조잘댄다. 넌 충분히 파랗지 않고 넌 충분히 둥글지 않다고. 그러니까 좀 더 파랗게 칠해보라고, 좀 더 둥글게 깎아보라고. ‘너’가 되려는 노력은 이렇게 금방 스러질 일이라고. 그러니 그만두고 그럴 시간에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나는 다시 묵묵히 성을 쌓는다, 괜찮다 다시 무너질지라도. 젖은 모래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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