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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도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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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크 Feb 25. 2024

K-도비(圖婢) 퇴사기

이 월급은 감사 못하겠는데요? 

교생실습 당시 담당 선생님의 추천으로 대학원 재학 중에 운 좋게 원하던 직장에 계약직 사서교사로 취업을 했다. 어린 나이에 계약직 생활에 안주하는 내가 걱정되서였을까? 1년쯤 지났을 때 주변 어른들은 그래도 꾸준히 준비해서 정규직 자리를 알아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언을 해주셨지만 딱히 귀담아듣지 않았다. 회사에 비전이 없다며 퇴사를 결심하는 친구의 얘기에 '내가 근무하는 학교도 딱히 비전은 없는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직 준비로 이어지진 않았다. 고용 안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내가 계약직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이직이나 퇴사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계약직을 향한 사회의 쓴 맛을 잘 몰라서였다) 그만큼 일이 보람 있고 즐거워 직업만족도가 높았고, 여기서 경력을 좀 더 쌓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얼마 뒤 상황이 달라졌다. 일련의 사건들로 나는 결국 퇴사를 했다. 이직할 곳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사를 결심했던 배경은 이렇다.


첫 취업을 한 학교에서 근로계약서에 서명 후, 사본을 주겠거니 했는데 받지 못했다. 나는 원래 할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고, 직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행정실에 문의하기가 껄끄러워서 근로 계약서를 받지 않은 채로 계속 근무를 하던 중에 방학 중 연가 사용과 관련해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내 계약조건은 방학 중에는 도서관을 운영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방학 중 특별활동 수업으로 학생 등교 시에 한해 일시적으로 도서관을 개방하고 그에 따른 추가수당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다음 방학 때 해외여행을 계획했는데, 일정 중 하루가 전 교직원 출근날과 겹쳐 문제가 발생했다. (알고 보니 전 교직원 출근날은 정규 교사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사실 나는 문제가 될 것도 아니었다.)


항상 내가 업무 보고를 하던 영어 부장님께 이런 상황을 설명드렸는데, 갑자기 시간강사를 담당하는 J 교사가 나타나 방학 중 해외여행은 안 된다고 하며, 특별활동 수업과 상관없이 방학 중에는 무조건 출근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내 근로계약서를 담당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계약조건과 다른 말을 하니 너무 황당했다. 말씀하신 내용이 제가 계약한 내용과 다른데 행정실에 가서 근로계약서 사본을 요청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누가 행정실에 그런 요청을 하냐며 J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그런 요청하면 “넌 모가지 끽”이라고 했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근로계약서 사본 교부는 의무 사항으로 위반 시 벌금까지 내야 하는 사안인데 마치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듯 “모가지 끽”이라며 위협하는 태도가 무섭게 느껴져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었다. 너무 서러워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어른들은 사회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당장 자른다는 게 아니니 감정을 잘 추스르고 객관적으로 퇴사의 득실을 따져본 후 퇴사든 이직준비든 현명한 결정을 하라고 한마음 한뜻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느 직장에나 또라이는 있다. 다른 곳으로 이직한다고 해도 또라이가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고, J 교사보다 더 매운맛 또라이가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또라이 질량보존 법칙에 의해, 또라이가 없다면 내가 또라이...) 1인 사서로서 도서관 운영을 총괄하며 신규 도서관을 키워가는데 보람을 느꼈고 원어민 교사들과 함께 하는 도서관 수업도 재밌었다. J교사만 제외하면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그 뒤로 일 년을 더 근무했고, 재계약 시기가 다가왔다. 역시 하나만 이상한 사람은 없는 법인지 J 교사는 전교 시간강사들을 교실 한데 모아 놓고 호명을 하며 근로계약서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 학교에서 월급 제일 많이 받는 OO선생님~ 계약서 사인 하세요.’라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사본을 받지 못할 걸 알았기에 내용을 꼼꼼히 체크했다. 그런데 지난번 재계약 때와 다르게 월급이 그대로였다. 서명에 앞서 J 교사에게 가서 조심스레 월급 동결에 대해 물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가관이었다. “여자가 어디 가서 이 월급 받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다녀야 돼"라고 했다. 복도에서 J교사를 마주칠 때마다 떠오르는 ‘모가지 끽’ 사건을 애써 잊으며 오로지 일이 좋아 수당 없는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도서관 활성화를 위해 홀로 애썼는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 여자가?? 여자가??? 이 월급에 감사를 하라고? 기분이 나빴다. (감사할 만큼의 월급이나 주면서 얘기하던지)


마음 같아서는 ‘저는 서명 안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다들 이의제기 없이 서명하는 분위기 속에 혼자 튀는 행동을 한 후에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또 아무 말 못 하고 서명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이 삭이지 않았고, 이참에 퇴사를 하고 미뤄둔 석사 논문을 쓰고, 정규직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영어 부장님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드렸다. “사실 어제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요. 2월 말까지만 근무하고 퇴사를 하겠습니다. 후임 알아봐 주세요.” 


학교가 난리가 났다. 영어 부장님이 나를 회유하고, 그 까칠한 행정실 부장님도 나를 찾아와 세상 친절하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시고, 교무부장님, 교감선생님까지 돌아가며 나를 찾아왔다. 교감 선생님은 나를 위한답시고 난데없이 과학실 보조교사와 비교를 하며 그래도 그에 비하면 이선생은 학교에서 대우를 잘해줬는데 왜 그러냐는 식이었다. '도대체 이 학교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없나?' 싶었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자격요건은 있지 않는가. 잘못된 비교 대상 설정에 학교 관리자가 생각하는 사서교사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고, 퇴사하는 마당에 할 말은 해야겠다 싶었다.


“교감선생님, 과학실 선생님과 저는 애초에 채용 자격 요건이 다른데 그렇게 비교하시면 안 되죠. 영어 능통자 사서교사 구인하셨잖아요.”, “교무부장님, 저 사서교사 자격증도 있고, 영어교사 자격증도 있고, 지금 당장 기간제교사를 해도 월급도, 대우도 지금보다 훨씬 좋아요. 계약 조건도 처음과 달라졌고, 내년에 월급이 오른다는 보장도 없는데, 이런 대우받으면서 다닐 필요가 없어요. 당장 교사 자리 만드실 수 있으세요? 그럼 다시 한번 생각은 해볼게요.” 다들 나를 회유하지 못하고 씁쓸히 도서관을 나가셨다. 


나를 회유한답시고 뱉는 말들은 나를 더 열받게 했고, 삐뚤어진 나는 퇴사 과정에서 행정실에도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의 띠껍고 비협조적인 태도에 행정실 차장님도 꽤나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모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시던 차장님은 신경질스러운 어조로 “근로계약서 사본이 필요하면 와서 달라고 하면 되지, 왜 아무 말 없다가 이렇게 행동하시냐”라고 나를 나무랐다. 이미 삐뚤어진 나는 할 말 다 한다! “행정실 가서 사본 달라고 하면 모가지 끽 이라는데 어떻게 달라고 해요???" 설마 누가 그런 말을 했겠냐 싶었나 보다. 가만히 지켜보시던 행정부장님이 역시나 까칠하게 “누가요?”라고 물으셔서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정 OO이요. (앞서 말한 J교사고, 이 와중에 선생님이며 교사며 호칭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행정실 사람들은 놀라 벌어진 입을 겨우 다물며 아무 말하지 못했고, 난 그렇게 퇴사를 했다. (보고 있나 정 OO, 덕분에 퇴사하고 석사 학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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