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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an 08. 2018

영화 1987을 통해 본 명동성당

서울특별시 중구

아래에서 올려다본 명동성당

천주교를 상징하는 건물을 꼽으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명동성당을 이야기합니다. 명동성당은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지만, 사회 변혁의 중심지로서 많은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명동성당은 종교를 넘어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어 많은 분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명동은 예전에는 많은 연인들이 찾던 데이트 코스였으며, 최근에는 외국인들이 꼭 방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입니다. 그 명동에 위치하고 있는 성당이 바로 명동성당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매번 방문하는 장소는 아닙니다. 저도 연애하던 시절 명동은 자주 들렀지만 명동성당을 방문한 것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많지 않습니다. 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12월에 명동성당을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명동성당이 저에게 큰 의미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화 '1987'을 보면서 명동성당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어 졌습니다.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는 신도

명동성당터는 조선시대 명례방이라 불리는 행정구역으로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이승훈이 세례를 주었던 곳입니다. 개항 이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블랑 주교를 중심으로 이곳에 성당을 세울 목적으로 땅을 매입합니다. 그리고 1887년 성당 착공을 위한 공사가 시작되지만 이듬해 조선 정부의 요구로 중단되어버립니다. 중단시킨 이유가 왕들의 어진을 모시던 영희전과 가까워 풍수지리상 성당이 들어서면 나라에 안 좋은 기운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로 실제로는 유교의 나라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탄압하던 천주교 성당이 왕이 살고 있는 궁궐 가까이에 있는 것이 껄그러웠을것입니다. 

 

결국, 성당 공사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 1892년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복잡했던 국내 정치상황과 경제적 여건 등으로 공사는 지연되기를 반복하다가 1897년이 되어서야 완공됩니다. 명동성당은 다른 지역에서 세워졌던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외국 선교사들의 지휘 감독 아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자금과 노동력을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공사는 중국 기술자들에 의해 완성되면서 명동성당은 이미 한국을 넘어서 국제적인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웅장함을 지닌 명동성당

천주교는 조선말 박해를 받으면서도 종교적 신념을 잃지 않고 자유와 평등을 위해 많은 노력과 희생을 감수한 결과 종교적 자유를 얻었습니다. 100여 년간 박해받던  천주교가 합법화된 종교로 한국에 설 수 있음을 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명동성당 건축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는 일제에 의해 곧 꺾이게 됩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천주교는 독립운동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교세 확장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 이유는 일제는 독립운동과 종교를 분리시키는 정책을 폈고, 1941년까지 서울교구장과 명동성당 주임신부를 프랑스 선교사가 계속 역임하면서 동조한 결과 발생한 현상입니다.

종교는 신의 공간으로 세속적인 삶과 분리시키려는 분들도 계시지만,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본다면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직자도  민족 구성원의 한 명이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만약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국가나 사회체제 밖 별도의 공간을 만들고 스스로 삶의 모든 부분을 해결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가 사회와 완전하게 분리하지 않고 혜택만 받으려 주장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도 종교는 정치와 경제 흐름과 국가로부터 완전 분리될 수 없기에 사회조직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도 져야 하는 것입니다.


1930년대까지 프랑스와 일본은 식민지를 통해 부를 획득하며 나라를 운영하는 제국이었습니다. 식민지들의 희생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던 두 나라는 동맹국가로서 많은 공조를 했습니다. 또한 천주교를 운영하기 위해서 일제 집권 계층과 반목과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협조하는 것이 쉬운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프랑스 선교사들이 정경분리를 내세우며 독립운동을 반대한 것은 당시 우리 선조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었던 정책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 일제강점기 천주교는 이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교육과 자선사업을 했을 뿐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가톨릭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명동성당은 1930년대 말 전시총동원에 협력하여 많은 인력과 물자를 일제에게 내놓도록 협조하는 잘못을 저지른 결과 신도수가 급격히 감소해버립니다.





다양한 각도로 바라봐도 아름다운 명동성당

광복 이후 미국으로부터 오는 많은 구호물자를 배급하던 배급소가 명동성당에 설치되고, 주교회의가 명동성당에서 고정적으로 열리면서 명동성당과 가톨릭은 교세를 확장하며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명동성당의 위상이 변화되면서 명동성당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의식도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군정 초대 군정장관이며 미소공동위원회 수석대표였던 아놀드 소장이 명동성당에서 예배를 보면서 명동성당은 많은 정계 거물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계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원을 환영하는 의식이 진행되었지만 점차 종교기관으로서 역할보다는 정치적인 색채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우익 민족진영 측의 행사가 명동성당에서 자주 거행되었습니다. 이는 교구장이 한국인으로 교체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일제강점기 시절 받았던 많은 비판을 받았던 영향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종교에 위협적이었던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미국의 영향력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명동성당 별관 앞 예수님

미군정하에서 안정과 발전을 꾀하던 가톨릭과 명동성당은 6.25 전쟁 중에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납북되어 많은 인재를 잃게 됩니다. 서울이 공산정권하에 점령당해 있을 때에는 성당은 종교로서의 장소가 아니라 군사시설로 이용되고, 성직자들은 북한 정권에 동조할 것을 종용받았습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되면서 명동성당은 곧 정상화를 되찾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명동성당 건물이 폭격의 피해를 벗어나면서 재건하는데 기나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폐허가 된 서울에서 건재할 수 있었던 명동성당은 전쟁 기간 동안 구호물자를 나누어주는 창구로 활용되면서 사람들의 긍정적인 호응을 이끌어냅니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울에서 지식인들이 모일 장소는 많지 않았습니다. 지식인들이 명동성당에서 교류를 하면서 명동성당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잘못을 비판하고 올바른 일에 앞장서는 것이 성직자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명동성당 실내

6.25 전쟁 전후로 12년 동안 이승만 정권은 온갖 부정된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역사 교과서에 실린 부정된 사건들만 해도 하나둘이 아닙니다. 국회의원을 납치하고 헌법을 불법으로 변경하며, 경쟁자였던 조봉암을 공산당으로 몰아세워 처형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를 비판하는 언론은 탄압을 하여 폐간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폐간까지 당했던 언론기관이 가톨릭이 운영하던 경향신문이었습니다.


결국 국민들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참정권을 무시하는 3.15 부정선거는 국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면서 4.19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이 당시 명동성당에서는 4.19 의거의 주체였던 학생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혁명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던 동국대생 노두희의 장례미사를 열면서 독재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명동성당을 비롯한 가톨릭은 항거를 포기하고 다시 침묵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쿠데타가 국민의 호응을 받았기에 침묵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제2공화국이 매우 혼란하며 불안감을 조성했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낫다고 판단하고 침묵을 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명동성당과 천주교는 가장 큰 무기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은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반성과 사과에 그치지 않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행동으로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습은 일부 개신교들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모습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명동성당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잘못된 행동을 냉철하게 반성하고 밝히고 있으니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시민들에게 어떤 종교보다도 천주교에 긍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내는 요인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당 내의 예수님

군사쿠데타에 침묵했던 가톨릭이 1968년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고, 다음 해 추기경으로 서임되면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군사정권에 바른 소리를 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목소리는 국내에만 머무르는 작은 소리가 아니었기에 당시 정권에서도 쉽게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74년도에 벌어진 지학순 주교 사건입니다. 원주 교구 지학순 주교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에게 김지하를 통해 돈을 전달하다 빨갱이로 오인받아 중앙정보부에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천주교 정의구현 정국 사제단'이 명동성당에서 시국선언을 하고 2000여 명과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면서 당시 유신정권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1976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운동 기념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윤보선, 김대중 등 12명이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면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합니다. 유신 정권을 흔들지는 못했지만, 가톨릭이 더 이상 잘못을 묵인하며 침묵하는 종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부터 명동성당은 가톨릭을 대변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민주화의 상징으로서 변모되기 시작합니다.





명동성당의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1980년 초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전두환과 노태우에 의한 12.12 군사반란으로 무효가 되어버렸습니다. 제5공화국은 유신정권보다 더 심한 탄압을 하면서 정권을 획들하면서 시민들의 인권은 다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과거 정권과 똑같이 안보를 내세우며 국민들을 오도합니다. 반대세력을 공산당으로 몰아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반대세력을 전쟁을 획책하고 사회를 붕괴하려는 공산당으로 몰아 공포 분위기를 형성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해버렸습니다. 과거 정권에서 공산당으로 모는 과정이 개인에게 한정되었다면 제5공화국은 광주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피바람을 일으켜버릴 정도로 범위가 확대되고 악랄해졌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광주 항쟁으로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자 김수환 추기경이 시국 관련 담화문을 발표하며, 명동성당에서 철야기도회를 개최합니다. 그 이후에도 최기식 신부와 구속자들을 위한 특별미사가 열리며 가톨릭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임을 천명합니다.


그중 무엇보다도 명동성당이 시민들에게 민주화의 성지로 부각된 것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내놓으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생이었던 박종철이 1987년 1월 수배자였던 박종운과 공범이라며 경찰이 불법으로 체포합니다. 체포된 박종철은 대공수사단이 있던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던 도중 사망하고 경찰은 이를 은폐해버립니다. 하지만, 세상에 박종철의 죽음이 알려지자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오보하며 넘어가려 합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언론의 진상보도로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사망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결국, 제5공화국은 민심이 박종철 고문사건으로 들끓어올라 정권 이양에 방해가 될 것을 경계하고자 꼬리 자르기로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을 해임해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시국이 잠잠해지리라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상이 터져버립니다.







명동성당의 문화공간 꼬스트홀

198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를 적나라하게 밝혀버립니다. 이로서 개인이 고문을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권력을 사유화하여 시민들의 인권을 짓밟아버린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시민들은 세상을 자신들의 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후 명동성당은 6.10 민주항쟁의 중요한 구심점이 됩니다. 명동 농성이라고 부르는 그 당시, 뉴스에서는 매일 명동성당을 비추며 세상이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호헌철폐, 그리고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기본 안으로 하는 헌법 개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영화 1987년을 보면 저는 많은 반성을 해야 했습니다. 과거 무비판적으로 사실을 인식하고 주변에 이야기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이야기만 할 줄 알았지 잘못된 세상을 바꾸려는 일에 무관심하여 동참하지 않았던 나날들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명동성당이 가톨릭의 성지보다 민주화의 상징으로 우리들에게 인식되었는지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정면과 다른 이미지를 주는 명당성당 뒷모습

1987년에 저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방과 후에 집에 올 때면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매운 냄새로 밖에 나가 놀지 못하는 것만이 불만이었던 철부지 같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6월 민주항쟁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던 그때, 유일하게 들을 수 있었던 정보는 부모님이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지역감정과 생계문제로 늘 보수적인 모습을 가진 부모님이 나눈 대화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부정적인 내용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택시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민주항쟁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경제활동에 방해가 되는 일이었을 겁니다. 제가 그 당시 아버지였다면 민주항쟁에 대한 어떠한 판단을 내렸을까 생각해보니 쉽지 않습니다. 가족과 사회 중 무엇이 먼저이냐는 쉽게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어른들만이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열띤 토론의 장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부모님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입니다. 충청도 분이었던 부모님은 김종필을 지지하고 김대중을 안 좋게 여기셨습니다. 지금의 제가 판단해보면 지역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시 올바른 정보가 시민들에게 공급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꼭두각시가 되었던 지상파 방송들에 의해 조작된 뉴스만 접하면서 많은 부모님 세대들은 판단의 폭이 좁아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동성당 뒤편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리는 신도

물론 부모님을 과소평가하고 잘못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던 저에게 큰 영향을 주던 부모님이기에 한동안 정치에 대한 인식은 지역감정에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 교정에 나가던 날 여기저기에 붉은색 글자로 쓰인 현수막과 이한열 열사를 추도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경계심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대학에 들어가면 절대로 학생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심어졌던 저에게는 위험하고 관심을 줄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 운동하는 선배와 친구들이 말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 적도 없습니다.


재수를 하여 사범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생 운동하는 모습은 일부 학생들이나 하는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저 친구들과 하루를 즐겁게 지내며 노는 일만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교사를 꿈꾸던 저로서는 학생운동은 꿈을 좌절시킬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를 다니면서 사회나 정의를 생각해본 적 없이 저만을 위한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명동성당 사제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모든 1순위는 가족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당선이 되지 않아도 서운함과 동시에 끝이었습니다. 정부가 잘못하는 경우에도 술자리에서 욕이나 할 뿐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행동으로까지 옮긴 적이 없습니다. 집안 어른들하고는 되도록이면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너무도 달라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으면서 점차 회피해버렸습니다.


그런 제가 처음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추운 겨울날 광화문으로 달려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회에서 직장을 가지고 가족들과 살아가는 데 있어 풍족하진 않아도 부족함 모르고 살아가는 저에게 사회와 국가는 그다지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벌어진 사태는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많은 행복과 자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엄습해왔습니다. 다가올 미래가 깜깜해져 여기저기 헤매다 다칠 아이들이 걱정되었습니다. 한 번도 역사 속에서 올바른 일에 참여하여 바꾸어보려고 했던 적이 없던 제가 촛불집회에 참여한 것은 나와 가족들을 위한 이기적인 부분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촛불집회를 참여한 후 사회나 국가는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이후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주인의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도 수많은 촛불 중의 하나였다고 말입니다.





사제관 앞 '사형선고받으심'이란 제목의 작품

서울의 중심지 한 복판에 있는 명동성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것을 보고 갈 것입니다. 저도 명동성당을 방문하면 단순히 성당의 전반적인 역사와 건축물만 봤습니다. 그러나, 영화 1987년을 본 이후 명동성당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 역사를 바꾼 장소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메고 돌아가셨듯이 누군가의 용기 있는 희생과 노력 속에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만들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보입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중심으로 제 역할을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변치 않으리란 믿음을 우리에게 줍니다. 앞으로도 잘못된 일이 나타나면, 명동성당은 언제나 문을 열어주리라 생각됩니다. 명동성당은 언제나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기꺼이 함께하리란 믿음은 명동성당이 걸어온 역사가 보증해주는 것 같습니다.




볼거리가 가득한 명동성당 지하

너무 무거운 주제로 글을 썼지만 명동성당은 밝고 유쾌한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동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내며 발산하는 밝은 기운들이 명동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명동성당은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태양따스함도 많이 받아 방문하는 이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줍니다. 또한 가운 마음으로 명동성당을 가도 언제나 우리에게 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가족 나들이나 데이트 코스로 명동성당을 활용해도 좋습니다. 명동성당 지하에는 아기자기한 물건과 재활용한 물품을 파는 가게, 그리고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전시해놓은 전시장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오래된 우표를 볼 수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인터파크에서 운영하는 서점과 카페가 있어 쇼핑과 관람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서점에서는 북콘서트도 주최하고 있으니 시간만 맞춘다면 작가와의 만남을 가져볼 수도 있습니다.


주말 특별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명동과 명동성당을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많은 분들은 명동과 명동성당에 대한 추억이 하나 이상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가까운 사람과 나누어보는 시간을 가도 좋을 듯싶습니다. 만약 명동을 가보지 않았다면 세계인들이 이곳으로 구경 오는 이유를 직접 느껴보며 명동성당까지 방문한다면 더욱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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