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열정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 도를 대표하는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다. 4월 13일에는 국내에 설립되었던 한성 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지자 그동안 결집되지 못했던 독립운동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에 부흥하듯 1920년 북만주에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에 대한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일제의 간도참변과 같은 가혹한 탄압에 독립운동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공산당의 유입도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였다.
결국 1920년대 중반부터 독립운동이 주춤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독립운동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개인 소유의 기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상해에 오지 않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없는 임시 정부는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신채호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이 국제연맹이 한국을 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낸 사실을 문제 삼고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져, 갈등과 대립을 겪으면서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실망한 국민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독립 자금을 지원하지 않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요인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침체기를 극복하고자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한인애국단의 의거활동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을 국내외에 알림으로서 식어가던 독립운동의 불꽃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때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로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젊은이는 한국말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가정부(假政府:일제가 부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치를 물어보며 찾아 온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인들은 기노시타 쇼조의 방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가 위치하고 있어도, 일제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수상한 젊은이는 김구를 향해 독립운동을 하고 싶으니 어떠한 일이라도 맡겨달라고 요청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한 결같이 일제의 간첩이 확실하니 돌려보내자고 하자, 김구도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청년을 돌려보낼 수는 없어서 개인 신상을 물어보니, 젊은이는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난 이봉창(1901~1932)이라 답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여력이 없어 현재는 독립운동을 맡기기 어려우니 돌아가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봉창은 근처 일본 철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기다릴 테니, 독립운동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의 눈빛이 남다름을 보고, 김동우에게 이봉창이 머물 여관을 잡아주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감시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이봉창은 자신을 감시하는 것에 괘의치 않고 철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월급을 받으면 술과 국수를 사와서 요인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가 여러 차례 이루어지자 이봉창의 삶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려는 이유가 드러났다. 이봉창은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은 월급과 부당한 처우를 받자,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19살 때 남만철도회사 용산 정거장에서 운전견습생으로 일하였다. 직업을 바꾸고 성인도 되었지만, 부당한 처우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이봉창은 곧 자신이 한국인이기에 차별받고 있음을 깨닫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일본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일본인을 양아버지로 삼기도 했으나, 한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봉창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독립된 나라를 만들겠다며 먼 타국인 상해로 건너온 것이었다.
또한 이봉창은 일본 왕이 거리 행진을 할 때, 행인들과 함께 엎드려 있다가 폭탄을 던지면 쉽게 죽일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김구는 이봉창의 의기를 높게 평가하고 일본 왕을 죽이기 위한 거사를 준비하였다. 우선 이봉창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일본인이 알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일본인처럼 행동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봉창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멀리하면서 일인처럼 행동하였다. 얼마나 일본인같이 행동했는지 일본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중국 상인에게 내쳐지기도 하였고, 일본 영사관에 자유롭게 드나들기도 하였다.
그사이 일본 왕을 죽일 거사 자금이 마련된 김구는 왕웅을 시켜 병공창에서 폭탄을 하나 구입하고, 김현에게는 하남성의 유치에게 폭탄을 구입하도록 하였다. 의거용과 자결용으로 어렵게 마련한 폭탄 2개와 300원이라는 거금을 이봉창에게 주며 의거활동을 지시하였다. 폭탄과 돈을 받은 이봉창은 김구를 향해 말했다. “블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이 말을 통해 이봉창의 인물됨이 순수하고 솔직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사진관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촬영하면서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라며 김구를 위로하였다. 이봉창이 일본으로 떠난 지 10여일 후 잘 도착하였다는 전보가 오자, 김구는 200원을 더 보내주었다. 이봉창은 일본에 도착해서 의거활동을 숨기기 위한 방법으로 술과 향락에 많은 돈을 썼다. 그런 와중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부터 200원을 받자 “돈을 미친 것처럼 다 써버려서 주인댁에 밥값까지 빚이 져 있었는데. 200원을 받아 다 갚고도 돈이 남겠습니다.”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사쿠라다문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의 폭탄 투척으로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정작 일왕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았다. 일왕을 죽이고자 했던 의거는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봉창의 의거는 실패가 아닌 성공이었다. 이봉창이 의거 활동은 전 세계에 큰 이슈가 되었다. 특히 우리와 중국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어느 누구도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만주사변으로 일제에게 영토를 빼앗기며 위기감을 느끼던 중국에게 이봉창 의거는 너무도 고맙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였던 청도 민국일보는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를 따라 다른 중국 신문들도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를 문구로 이봉창 의거를 칭찬하는 글을 실었다. 일제는 이봉창 의거에 대한 중국 태도를 문제삼으며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물론 상해사변은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일으킨 만주사변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
이후 일제는 상해사변을 승리하고, 홍커우 공원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윤봉길이 행사장에 폭탄을 던지며 의거활동을 벌인 결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이봉창의 의거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사는 크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이봉창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결혼하지 않아서 유가족이 없어 일본에 있던 이봉창의 유해는 광복 후 김구의 노력으로 1946년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이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받들어야 한다는 김구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봉창의 동상은 백범 김구 기념관 앞에 서있다.
주소: 서울 용산구 임정로 26
찾아가기: 6호선 효창공원역 1번 출구로 나와 백범 김구 기념관을 찾아가거나 400번을 타고 효창동 주민 센터에서 하차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