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많은 젊은이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의 거리다. 온갖 공연으로 볼거리가 가득한 이곳에 동상이 하나 서있다.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모델로 삼았던 김상옥 의사(이하 의사는 생략)가 동상의 주인공이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상옥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지만, 한편으론 일본 경찰 천여 명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면서 10여 명을 사살한 것이 사실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김상옥이 일제에 맞서 영화의 주인공처럼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험한 일을 하면서 길러진 체력과 강단이었다. 김상옥은 서울 효제동에서 김귀현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너무도 가난했기에 8살의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 했다. 쳇불 공장에 나가 잡일을 하며 어른들에게 치이며 세상에 너무 일찍 눈을 떠버렸다. 14살이 되던 해에는 근처 대장간에서 일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아마도 김상옥의 체력과 강단은 이때 길러지지 않았을까 싶다.
김상옥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어린나이에 혹독한 세상과 접하게 되었지만, 부모와 세상을 탓하지 않고 올바른 성품으로 꿈을 키워나갔다. 글을 알아야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 생각하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늦은 밤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학문을 익혔다. 야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되어 공부를 할 수 없게되자, 김상옥 스스로 동흥야학교를 세워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이어나갔다.
글을 깨우치자 자신이 왜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더불어 아버지가 왜 세상을 탓하며 삶을 포기했는지,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에 의해 고통받고 신음하는지 깨닫게되었다. 특히 23살이 되던 1912년 삼남지방을 돌아다니며 약을 파는 행상을 하는 동안 일제의 만행을 하나도 빠짐없이 봤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글을 통해 세상을 바로 알 수 있다면, 일제의 탄압을 받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김상옥은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벌었다. 힘들게 번 돈으로 결혼도 하고 영덕철물상회를 세웠다. 직공이 50여 명이 될 정도로 큰 상회였으니, 김상옥은 자신만의 노력으로 인생역전을 이루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영달이 목적이 아니었던 김상옥은 직공들에게 많은 월급과 처우를 제공하고, 밖으로는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 국산품 장려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자립을 도왔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직공들과 만세운동을 벌이던 김상옥은 일본 경찰이 여학생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고, 맨 주먹으로 일본 경찰을 때려눕히고 군도(군인용 칼)를 빼앗아버렸다.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확산시키고자 ‘혁신단’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혁신공보>를 매회 1천 부씩 제작하여 항일 소식을 전하였다. 일제는 <혁신공보>를 발간했다는 명목으로 김상옥을 잡아 40여 일간 끔찍한 고문을 가했으나, 끝내 김상옥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내지는 못하였다.
3·1 운동과 <혁신공보>로 고초를 겪은 김상옥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교육과 언론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독립을 위해서는 조선총독을 사살하고 식민 기관을 파괴하는 의열투쟁이 필요하며 그 선봉에 자신이 서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뜻대로 거사가 이루어지진 않았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이 방한한다는 소식에 조선총독을 죽이려고 준비하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그곳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김상옥은 1922년 11월 안홍한과 함께 권총 4정과 8 백발의 총알을 가지고 압록강을 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이토 총독을 죽이고 일제의 상징과도 같은 종로 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서 말이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서편 창문으로 폭탄을 던져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김상옥은 조선총독을 죽이기 위한 다음 작전을 위해 용산 후암동에 거주하는 매부 고봉근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행랑에 세 들어 살던 여인이 친정오빠에게 권총을 들고 있는 이상한 사람이 집에 있다는 말을 하면서, 범인을 찾던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김상옥의 거처를 알게되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1월 17일 일본 경찰들은 김상옥을 잡기위해 고봉근의 집을 에워쌌다. 그중에는 격투기에 능했던 유도사범 다무라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들은 김상옥에게 상대가 되지못했다. 김상옥은 다무라를 죽이고 포위망을 뚫은 뒤, 눈으로 덮여 걷기도 힘든 남산을 후딱 넘어갔다. 총으로 무장한 일본 경찰들은 날쌔고 용맹한 김상옥이 달아나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김상옥은 안장사 사찰로 들어가 승복으로 변복을 한 뒤 효제동 이혜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들도 끝까지 추격해왔다.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김상옥을 찾았고, 끝내 1월 22일 새벽 5시 천여 명(400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의 무장한 경찰들이 이혜수의 집을 포위했다.
김상옥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 살기 위해 서울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일제의 침탈에 한국인의 매서운 맛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행동을 보고 일제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독립을 향해 나아갈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김상옥은 양손에 두정의 총을 쥐고 일본 경찰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김상옥의 두 발의 총알이 발사되자, 일본 경찰 천여 명이 쏘는 수천발의 총알이 집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김상옥은 굴하지 않고 5채의 가옥을 넘어 다니며 총격전을 벌였다. 김상옥이 쏘는 총성에 일본 경찰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다. 일본 경찰 어느 누구도 두려움에 김상옥을 향해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3시간이 넘는 교전 끝에 김상옥이 가진 총알이 다 떨어졌다. 단 한 발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김상옥은 일제의 손에 잡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 탄환을 자신의 머리를 향해 쏘아 자결했다. 마지막 총성이 울리고도 일본 경찰들은 한동안 김상옥 곁으로 오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하고서야 일본 경찰은 김상옥 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일본 경찰이 김상옥의 주검을 보는 순간,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김상옥의 몸에는 무려 11발의 총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1발이나 맞았으면서도 일본 경찰과 맞서 싸우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많은 피를 흘리면서 총상으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자결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영화에서나 가능해 보이는 교전을 벌였던 김상옥이 조선총독 암살을 조금만 뒤로 미루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뛰어난 상업 수단, 뛰어난 체력과 격투 실력, 뛰어난 사격술과 전술을 무장독립군에게 알려주었다면 독립을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김상옥의 죽음이 너무도 안타깝고 슬프기 때문이다.
김상옥 의사가 돌아가신 33살은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겨야 할 젊은 나이다. 김상옥 의사가 만들어놓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삶을 즐기며 행복해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언제까지나 흐뭇하게 바라봐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