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영풍문고 앞에 전봉준 장군(이하 장군 생략)의 동상이 있다. 과거 이곳은 죄수를 가두어놓고 처형하던 전옥서 터로, 녹두장군 전봉준이 처형된 장소다. 이후 많은 민중들은 전봉준이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에 가슴 아파하며‘파랑새’란 노래를 불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
여기서 파랑새는 파란 군복을 입은 일본군으로, 전봉준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됨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노래에 담겨있다. 도대체 전봉준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전봉준은 전라북도 정읍(당시는 고부)시에 살던 특별할 것 없는 몰락한 양반이었다. 부유하지 않았기에 전봉준은 젊은 시절 농사짓고, 약도 팔면서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그러나 아버지 전창혁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릇된 행동을 경계하며 어려운 이를 도와주는 일에 늘 앞장섰다. 그래서일까? 작은 체구의 전봉준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전봉준을 믿고 따르며 의지했다.
그러던 중 당시 영의정 조두순의 친척이던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하였다. 부정한 방법으로 관료가 된 조병갑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군민을 수탈하였다. 돈을 뜯어낼 구실이 없으면 불효죄, 음행죄 같이 객관적 증거가 필요 없는 죄명으로 잡아들여 협박하였다. 이 외에도 아버지 공덕비를 세운다며 백성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필요도 없는 만석보를 강제로 증축하여 수세를 거둬들였다.
과도한 수탈을 힘겨워하던 고부 사람들은 전창혁(1827~93)에게 자신들의 어려움을 조병갑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창혁은 마을 사람들을 대표하여 조병갑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오히려 관료를 능멸하다는 죄명으로 몽둥이질을 당한 뒤 쫓겨났다. 이후 시름시름 앓던 전창혁은 장독(매를 맞아 생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전봉준은 이 당시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학에 35살의 나이로 입교하여 제2대 교주 최시형에게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접주(포교소 또는 교구)로서 인간 평등 사상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을 돈으로 보는 조병갑의 횡포에 아버지마저 죽자, 전봉준은 그 해 12월 조병갑에게 진정을 넣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하자,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돌리며 20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리고 1894년 1월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조병갑을 효수하여 탐관오리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려 했으나, 눈치빠른 조병갑은 관찰사 김문현이 있는 전주로 이미 도망쳐버렸다. 이에 전봉준은 곡식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사람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관군의 보복을 피해 백산으로 이동했다.
고부 민란의 진상 조사를 위해 온 안핵사 이용태는 제대로 된 조사는 하지 않고, 아무 관련이 없는 농민에게까지 죄를 뒤집어씌우며 가혹한 탄압을 저질렀다. 이에 전봉준은 3월 무장(전북 고창)에서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제1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전봉준은 동도대장이 되어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에 임명하고, 4대 강령을 제시했다.
4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사람을 죽이거나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4대 강령은 동학농민운동이 특정종교나 동학농민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핍박받던 모두를 위한 대의임을 보여준다. 4대 강령을 실천하는 동학농민군은 가는 곳마다 많은 이들의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물론 대토지를 소유하거나 권력을 가지고 가렴주구하던 기득권층은 싫어했지만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동학농민군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였고, 기세는 점점 높아져갔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이기고, 조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전주성마저도 쉽게 점령했다. 조선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지는 않은 채, 당장 자신들의 보위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청의 군대가 들어오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내세우며 군대를 조선에 보내 각축전을 벌였다. 전봉준은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봉기했을 뿐, 외세를 끌여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전봉준은 정부와 적체되어있던 현안들을 해결하기로 합의하는 전주 화약을 맺고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은 돌아가지 않고 경복궁을 점령한 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라고 강요했다. 이를 본 전봉준은 나라의 큰 위기라 여기고 9월 삼례에서 다시 농민군을 규합하여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이 때 모인 농민군의 숫자만 10만여명에 달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10만 군대와 손병희가 이끄는 10만 군대가 논산에 집결하여 일본군을 내쫓으려 했지만, 상황은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랜 훈련과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기강이 해이한 조선 관군과는 달랐다.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계속되는 패배를 당해야만 했다. 6~7일간 40~50여차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우금치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1만의 농민군은 500여명만이 살아남았다.
결국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퇴각한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 그리고 순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은 1894년 12월 2일 체포되고 만다. 전봉준은 붙잡히는 과정에서 다리를 크게 다치며 거동하지 못했지만, 서울로 압송된다.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은 결과, 1895년 3월 30일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재판받던 전봉준의 심문과정이 담겨진 전봉준 공초를 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다.
심문자 : 작년 3월 고부 등지에서 무슨 사연으로 민중을 크게 모았는가?
전봉준 : 그때 고부 군수의 수탈이 심하여 의거하였다.
심문자 : 흩어져 돌아간 후에는 무슨 일로 군대를 봉기하였느냐?
전봉준 : 고부 민란 조사 책임자 이용태가 내려와 의거 참가자 대다수가 일반 농민이었음에도 모두를 동학도로 통칭하고, 그 집을 불태우며 체포하고 살육을 행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났다.
심문자 : 전주 화약 이후 다시 군대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냐?
전봉준 : 일본이 개화를 구실로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공격하고 임금을 놀라게 했으니,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워 그 책임을 묻고자 함이다.
불의를 바로잡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던 전봉준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전봉준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꿈꾸던 세상은 후손에게 이어졌다. 지금 우리들 마음속에도 살아 숨쉬며, 모두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미래를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