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대표하는 유관순

by 유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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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박근창이 『유관순은 허구인물이다』라는 책을 내놓았다. 일부 역사학자들도 이 주장에 동참하며 유관순 열사(이하 열사는 생략)가 실존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에 3․1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유관순을 배웠던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둥절했다. 물론 유관순이 허구 인물이라는 말은 아주 잘못된 주장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독립운동가 전부를 모욕하는 일이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 여사의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할아버지부터 개신교를 믿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유중권은 흥호학교를 운영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인 사회 선각자였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었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함양되어 있었다.


특히 유관순은 남들보다 큰 체격에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오빠 유우석은 유관순의 머리가 총명하여 한글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혼자서 글을 익혀 성경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유관순이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많이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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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눈에 띄던 유관순은 샤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이화학당 보통과에 1916년 편입하였다. 이화학당에서의 유관순은 학업에 충실하면서도 또래들과 장난을 많이 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일에 앞장섰다.


이화학당 고등과에 진학하여 열심히 공부하던 유관순에게 고종황제가 독살당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관순은 상복을 입고 고종황제의 죽음을 추도하는 의식에 참여했다. 더 나아가 3월 1일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일제는 학생들의 주도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학생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없애면, 시위가 곧 잠잠해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학교 휴교령은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큰 기여를 하게된다. 학생들은 휴교령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며 모든 이들이 동참하기를 촉구했다.


유관순도 3월 13일 휴교령으로 이화학당에 내려갈 수 없자,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에 몰래 숨겨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아버지와 조인원(1865~1932)에게 기미독립선언서를 내보이며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은 유관순을 칭찬하며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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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유중무가 교사로 있는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천안사람만이 아니라 충북 진천과 청주 등에서 3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외치고 만세삼창을 하자, 장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일제 경찰은 하늘을 뚫을 듯, 하나의 목소리로 크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겁에 질렸다. 겁이 난 일제 경찰은 불안감에 현장에서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두르며 시위행렬을 해산시켰다. 이 와중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다쳤다. 이 때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유관순은 공주 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확정 받았다. 다른 이들이 형량에 불복하며 상고한 것과 달리 유관순은 일제가 한국인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며 상고하지 않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 일제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2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1920년 3월 1일 같이 수감되어있던 이신애, 어윤희와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만세를 외쳤다. 어린 소녀들의 만세소리는 곧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형무소에 있던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만세를 따라 외치자, 그 소리는 3․1운동을 기억하는 이들을 형무소로 불러 모았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일제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행을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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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겉으로 한국인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치며 민족 분열을 획책하던 일제는 영친왕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수감자들의 형량을 줄여주거나 석방시켜주었다. 이 때 유관순도 1년 6개월로 형량이 줄어들었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제에 의해 수없이 폭행당한 어린 소녀의 몸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음식을 제대로 넘길 수도 없었고 제대로 서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유관순은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18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수없이 꿈꾸었을 자유롭고 평등한 그래서 행복할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보지 못하고 말이다.


일제는 자신들의 악행으로 숨진 유관순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유관순의 시신을 돌려달라는 이화학당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월터(walter)가 미국 신문에 일제의 비인도적인 고문으로 어린 소녀가 죽었다고 알리겠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유관순의 시신을 학교 측에 인도하였다.


유관순은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없애고 군용기지로 만들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일제하에서 관리가 안 된 유관순의 묘는 오늘날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후손들은 생가 뒷산 매봉산에 초혼묘를 만들어 넋을 기리고 있다.


유관순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민국의 주역이 바로 젊은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사회에 타협하고 불의에 순응할 때,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온 3․1운동의 주역인 학생과 수많은 청년들이 유관순으로 대변된다. 유관순이 다른 독립운동가의 업적에 비해 과대 포장되었다고 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기성세대의 올바른 가치관을 이어받고 잘못된 행동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순수하고 열정 넘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다. 유관순을 대표로 하는 청년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는 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4․19의거, 6월 민주항쟁에 이어 오늘날 촛불집회로 이어졌고, 이들로 인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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