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였기에 더 대단한 이시영

by 유정호


이시영 선생(이하 선생은 생략)은 독립운동사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며,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으로 다시는 외세에 흔들리지 않을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분이다. 그러나 이시영은 맨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일인자가 아니라 만년 2인자로 살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김구만을 떠올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6형제를 데리고 600억이 넘는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쏟아 부었던 이회영은 기억하지만, 동생 이시영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이렇듯 이시영은 드러나지 않는 2인자였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과 의지가 있었다. 아무리 자신과 가깝고 오랫동안 뜻을 함께 해왔을지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같지 않으면 따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시영은 누구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작은 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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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의 집안은 이항복의 후손으로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조선 후기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명문가였다. 이시영의 아버지 이유승도 이조판서를 역임한 고위관료로 주변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국권회복을 위한 상소를 올렸던 이유승의 국가관과 뛰어난 자질은 6형제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다섯째였던 이시영도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관직에 나가 10년 동안 홍문관 교리,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홍문관 교리나 형조좌랑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서도 특출한 능력을 가져야지만 갈 수 있었던 자리였으니, 이시영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시영은 정국이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답답했다. 외세의 침략은 점차 거세지는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급급하고 부정비리만 저지르는 관리들이 득실거리는 조정에서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폭이 너무도 작았다.


관직을 그만 둔 이시영은 더 많은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문에 매진하려 했으나, 세상은 이시영을 필요로 했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이 된 이시영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을사늑약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시영은 을사늑약에 낙담하지 않았다. 법을 통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판사가 되어 민중을 보호하면서, 안창호·이동녕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이시영은 신민회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를 내쫓은 뒤,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화정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뜻하는 바가 어려워지자 넷째 형 이회영의 뜻을 좇아 1910년 12월 매서운 눈바람을 뚫고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가족들과 망명하였다. 이시영은 떠나는 자리에서 “내가 이 문으로 다시 들어올 날이 없다면 자자손손이라도 들어올 날은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이 문을 나서는 이 시간으로부터 별별 고초와 역경을 당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아니하리라.”고 맹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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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원보에서 이시영은 교육과 상공업을 통해 독립 기반을 만드는 경학사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삼원보가 독립운동의 중심지라는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찾아오자,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규모를 늘렸다. 훗날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대단한 명예와 자부심을 가지고 청산리 전투와 같은 무장독립운동에서 큰 활약을 벌일 수 있었던 데에는 이시영의 노력이 컸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시영은 초대 법무총장으로 참여하여 독립하는 날까지 국민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끝까지 함께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하는 일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이승만 탄핵과 독립운동방향을 두고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임정을 떠날때에도 이시영은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이시영은 현장에서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주로 재무와 법무 그리고 감찰을 담당했다. 이시영이 맡았던 일은 독립 운동가들이 현장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느 한 순간도 풍족한 자금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이시영은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운영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여지는 일이 아니기에 많은 이들이 이시영을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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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남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인정받지 못할 경우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완수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시영은 참으로 대단한 성품과 뚝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윤봉길 의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김구만을 거론한다. 그러나 김구 혼자서만 계획하고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이시영이 뒤에서 조력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시영은 윤봉길 의거 이후 항저우에 임시정부요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피신처를 마련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켰다.


이렇듯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인생을 바쳤던 이시영은 1945년 76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에 돌아왔다.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유일하게 한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이시영이 느꼈을 감회를 우리는 감히 표현할 수 없다. 다만, 기쁨과 회한, 그리고 미안함 등 여러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이시영은 국내에 돌아온 후 한동안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하던 대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형제들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았던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신흥무관학교부활 위원회를 조직하고 신흥전문학관으로 발전시켰다. 신흥전문학관은 오늘날 경희대학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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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되찾았지만, 냉전체제 아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이념 그리고 권력에 대한 탐욕 등으로 혼란했던 시대는 이시영을 가만두지 않았다. 이시영은 김구가 남한정부 단독 수립에 대한 반대 의견을 피력하며,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는 의견에 반대했다. 그러나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돌아가셨을 때 누구보다 슬퍼하며 추도했다.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 했으나, 이승만 정부가 노골적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배제하고 친일파를 등용하자 크게 낙담했다. 특히 6․25전쟁에서 군인이 양민들을 학살하고 공직자들의 비리가 끊이지 않자,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하며 항거했다. 52년 대통령 선거 때에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이승만을 견제하며 올바른 나라를 세우고자 출마했으나, 선거판의 온갖 부정과 고령 등의 이유로 낙선하고 말았다.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지 못했다는 책임감과 비통함이었는지, 아니면 84세라는 고령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시영은 1953년 돌아가신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가장 아래에서 궂은일을 담당했던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말이다. 그리고 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최대의 성과를 이루어내기 위해 고심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부통령 이시영의 고뇌도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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