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앞에 이상재 선생(이하 선생은 생략한다.)의 동상이 서있다. 지금이야 이상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100년 전 이상재는 이념, 종교, 지역을 넘어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분이었다. 그렇기에 이상재가 돌아가셨을 때 모든 이들이 부모의 죽음으로 받아들였고,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사회장을 치렀다.
이상재는 충남 한산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주위 사람들이 고려시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목은 이색이 돌아왔다고 할 정도였다. 이상재도 목은 이색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 새로운 사회를 만들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 위한 첫번째 관문인 과거를 보는 순간 자신의 노력이 헛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부정시험을 통해 힘있고 돈 있는 사람만이 급제하는 당대의 현실에 이상재는 입신양명을 깨끗하게 포기한다.
대신 9살 많은 박정양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배워보기로 결정한다. 이후 10년 동안 박정양 집의 대소사를 돌보면서, 수많은 인사를 만나고 견문을 넓혔다. 박정양은 당시 신문물의 도입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도입하려던 인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상재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박정양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을 시찰하는 신사유람단 단장에 선임되자 이상재를 수행원으로 데려갔다. 이상재는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과거의 악습을 철폐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와 함께 조선도 빠르게 변화되어 가는 국제 정세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되었다. 특히 홍영식과 김옥균을 만나 의견을 나누면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홍영식도 우정국총판이 되었을 때 이상재를 우정국 주사로 임명하여 인천에서 재주를 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홍영식과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1884년)으로 인해 이상재는 오랜 관직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상재 또한 자주적이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데 뜻을 함께하기로 했던 지인들의 몰락에 큰 충격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박정양은 이상재의 낙향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마침 초대 주미대사로 미국으로 가게 되자 이상재를 2등 서기관으로 데려갔다. 미국에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이상재에게는 넓은 세상을 마주한 소중한 기회였다. 이후 마음을 다잡은 이상재는 박정양의 도움으로 갑오개혁(1894) 당시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으로 본격적인 관료생활을 하게된다. 이후 이상재의 특출한 능력과 새로운 세상을 견문하고 돌아온 이력은 학문국장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막중한 일을 담당케했다.
그러나 이상재가 인재를 양성하는 시간보다 일본을 비롯한 러시아 등 강대국의 조선침탈이 더욱 빨랐다. 특히 1896년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피신한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침탈이 매우 거셌다. 이상재는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을 주장하며 독립신문 발행 및 독립문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고종과 보수파들이 독립협회의 활동이 자신들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든다고 보고, 황국협회를 통해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상재도 만민공동회에서 러시아를 비난하며 민중을 선동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야했다.
1902년에는 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상재를 좋게 보지 않던 권력자들에 의해 국체개혁 음모죄로 아들과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상재는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출소 이후 YMCA 교육부위원장을 맡는 것을 필두로 1913년에는 전국 10여개의 YMCA를 통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청년들의 의식변화와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일본YMCA와 별도로 한국YMCA를 세계YMCA에 가입시키면서 한국이 독립된 나라임을 종교를 통해 세계에 보여주었다.
특히 이상재는 교육과 강연으로 청년들을 깨우치고, 일제의 식민지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상재는 풍자적인 말로 청년들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쉽게 설명하고, 일제관료나 친일파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랬기에 이상재의 말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통쾌함과 함께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을 해소시켜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이상재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많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우선 궁궐에 있을 때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을 욕보인 사건이다. 김홍육이 고종에게 보자기에 싼 뇌물을 바치자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며 보자기의 뇌물을 난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김홍육은 이 상황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거려야했다.
조선미술협회 발기식에서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공개적으로 망신주었다. 이상재가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대감들께서도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라고 말하자, 이들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이상재는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데 천재들이니 동경으로 이사하시면 일본도 또 망할게 아니겠소.”라고 답했다. 이완영과 송병준은 공개석상에서 항변도 못한 채 망신을 톡톡히 당해야 했다.
3․1운동 당시 배후 인물로 잡혀 들어갔을 때도 심문하는 일본 검사에게 “2만 명이나 되는 경찰과 형사들이 전국에 거미줄처럼 깔렸으면서도 너희가 그것을 몰랐다니 말이 되는가? 이제 와서 흑막 운운하는 것은 이토록 문제가 커지니까 책임을 회피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하며 다그쳤다.
서울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연설을 할 때는 “때 아닌 개나리꽃이 이리도 많이 피었을까?”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개나리꽃의 의미를 알아채고 큰 소리로 박장대소했다. 당시 강연장에는 이상재를 감시하기 위한 일본 경찰이 많이 있었는데, 이상재는 이들을 개(犬) 같은 나리라 풍자했던 것이다.
이처럼 친일파와 일제는 말로서 이상재를 이길 수 없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인물에게 해코지를 할 경우 불어 닥칠 후폭풍을 강담하기 어려워했다. 그럴수록 이상재의 말과 행동은 더욱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은 독립운동의 침체기로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다. 특히 좌우익으로 나뉘어져 독립운동이 분열된 상황은 독립운동가들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시작이 1927년 신간회 창립이다. 그러나 신간회 회장을 두고 좌우익간에 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좌우익을 넘어서는 인물, 모든 이들이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인물, 신간회를 짧은 시간에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이상재를 회장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상재는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거동도 하기 힘들 정도로 몸은 약해졌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은 태산과 같았다. 이상재는 비록 신간회 회장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없지만, 자신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회장직을 수락했다. 그 결과 신간회는 출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재는 자신의 마지막 일을 다한 듯 신간회 창립 한 달 뒤에 순국한다. 이상재의 마지막 활동이자 뜻을 이어받은 신간회는 이후 140여개의 지회와 4만 명에 가까운 회원을 확보하고, 광주학생운동 등 독립운동을 이끌고 지도하였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자신마저 조국을 떠나면 조선 안의 동포가 불쌍하다며 남았던 이상재 선생이 청년들에게 남긴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결국 세상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니... 이 불량한 것을 능히 다 통일해서 안정되게 만들 사람은 조선 청년에게 있으니 그것에 내가 제일 큰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