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만명을 살린 28살의 청년 현봉학

by 유정호

서울역 맞은편으로 연세 세브란스 빌딩이 있다. 이 건물 앞에 긴 코트를 입고 있는 젊은 남성의 동상이 있다. 양복과 코트를 입고 있는 동상이기에 역사적으로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연세 세브란스와 연관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동상에 관심 갖고 둘러보는 사람이 없다. 모두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갈 길을 향해 나아가기 바쁘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떤 업적이 있는지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세브란스 빌딩 앞 동상의 주인공은 한국의 쉰들러라 불리는 현봉학(1922~2007) 선생이다. 현봉학(이후 선생은 생략)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인 1922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다. 목사와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맡았던 어머니 밑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운 현봉학은 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몸에 익혔다. 현봉학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위암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이며 학업에 몰두한 결과, 해방되던 1945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현봉학의 자질과 노력하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특히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도움으로 현봉학은 미국의 버지니아 주립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현봉학은 의사로서 미국에 남아 편안한 삶을 살수도 있었지만,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고국의 동포들이 계속 떠올랐다. 결국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현봉학은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하는 1950년 3월 서둘러 귀국하였다.


그러나 의술을 펴기도 전에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다. 적화통일을 내세운 북한이 기습적으로 남침하면서, 북한군을 저지할 힘이 없던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서울을 빼앗겼다. 그 이후로도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아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와 동시에 UN에 북한의 침략을 알리며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 다행히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을 향해 군대와 물자를 보내주었다. UN군의 참전으로 제공권을 확보한 국군은 전세를 뒤집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UN군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던 국군과 UN군은 1950년이 지나가기 전에 통일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통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버린 국군과 UN군은 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결정해야만 했다. 특히 함경도 방면에서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원산을 빼앗겨 버렸다. 결국 함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비롯한 10만 여명의 군인들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흥남에서 배를 통한 철수를 결정하였다. 국군과 미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에 9만 여명의 북한 주민들은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으로 내려오고자 흥남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철수가 순조롭지 않았다. 영하 27도의 맹추위속에서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9만 명의 민간인들은 흥남에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불안감에 떨어야했다. 특히 민간인들은 군인들이 자신들을 흥남에 남겨두고 철수할 경우 북한군과 중공군에 의해 보복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한 숨도 편안히 쉴 수 없었다.


이 흥남에 현봉학도 있었다. 통역관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대변인으로 전쟁 한복판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현봉학은 알몬드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많은 제반사항을 처리하며 전쟁의 참혹상을 지켜봐야했다. 하늘에서는 미군 비행기가 중공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었고, 미군은 자신들의 무기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밀려드는 피난민들에 의해 철수가 늦어지자, 미군은 피난민을 데려갈 수 없음을 고지하며 강제적으로 통제선 밖으로 쫓아냈다.


통제선 밖으로 쫓겨난 많은 피난민은 자신들도 함께 데려가 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점차 작아졌다. 영하 27도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변변한 방한복을 갖추지 못했던 9만여 명의 피난민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피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미군이 지나가면 자신들을 데려가 달라고 소리 높여 힘껏 외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늙은 부모와 아이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서로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잠자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들의 병력이 우선이었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현봉학은 함경북도 출신으로 흥남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가족처럼 여겨지며, 그들의 고통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더불어 전쟁통에서 북한군에게 아무런 죄도 없이 학살당한 동포를 많이 봐왔다. 현봉학은 미군이 철수한다면 흥남으로 몰려온 9만여 명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알몬드 장군을 찾아가 피난민을 배에 승선시켜주길 부탁하였다.


그러나 알몬드 장군의 대답은 명확했다. 절대로 피난민을 배에 승선시킬 수 없다는 확고한 대답이었다. 수만 명의 병졸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알몬드 장군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200여척의 함정에 15일부터 24일까지 10만 5천명의 병력과 1만 7천여 대의 차량 그리고 많은 무기를 싣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철수가 늦어지면 밀려드는 중공군에 의해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고, 장비는 적들의 무기로 활용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현봉학도 알몬드 장군의 대답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 피난민을 포기할 수 없었다. 현봉학은 끊임없이 알몬드 장군에게 피난민을 데려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결국 현봉학의 눈물어린 호소는 결국 미군 사령관 알몬드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쐐기를 박아버린 것이 매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이 현봉학과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사실이었다.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정원이 60명에 불과한 자신의 배에 피난민을 승선시키기로 결정하고, 배에 실려 있던 모든 군수물자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태웠다. 자그마치 이 배에만 1만 4천여명의 피난민이 올라탔다.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꾸는 순간이었다. 이에 알몬드 장군도 흥남에 있는 피난민을 함정에 승선하도록 허가해주었다. 그 뿐아니라 피난민이 승선하는 과정에서 밀려드는 중공군을 막기 위해 미군을 최후방에 배치하여 피난민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군사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장군으로서 무기를 폐기하고 9만 2천명의 피란민을 함정에 승선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었을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설득한 사람이 바로 28살의 현봉학이었다.


9만 명이 넘는 피란민을 구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현봉학은 전쟁 이후 연세대학교 객원교수로 우리의 의학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콜롬비아 의대 등에서 여러 대학교수를 역임하면서, 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92년에는 미국 최고의 임상 병리학자에게 주는 ‘이스라엘 데이비슨 상’을 수상하며 대한민국의 저력을 세계에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6·25전쟁의 영웅이며 한국인으로서 세계 의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현봉학을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가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2016년에는 국가보훈처, 해병대 사령부, 연세의료원이 공동으로 현봉학 선생의 모교터인 세브란스 빌딩 앞에 동상을 세웠다. 많은 이들이 현봉학의 이름과 업적을 기억하길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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