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의 노동현장은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물론 사측과 노사가 협력을 통해 상생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노동현장과 오늘날을 비교하면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6·25 전쟁 이후 경제가 회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기업 그리고 시민들은 노동자의 어려운 현실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다. 기업이 성장해야 노동자의 삶도 나아진다며, 노동 환경 개선과 임금 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는 일이 다반수였다.
많은 노동자도 기업이 성장해서 나라가 부강해져야 자신들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산업 전선에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부당한 대우가 곧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기업의 성장만큼 노동자의 삶과 처우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정부는 수출 000억 불을 달성했다는 각종 행사를 통해 경제성장을 알렸지만, 정작 노동자에게는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특히 청계천 평화시장에 위치한 수많은 봉제공장 중에는 악덕 기업주가 여럿 있었고, 그들로 인해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창문을 모두 막아버린 밀폐된 공간에서 하루 15시간 이상을 근무했다. 이들은 공장 내에 가득한 미세먼지를 마시며, 연신 감기와 폐렴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시간과 노동조건에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오히려 병에 걸렸다는 것을 기업주가 알게 되면 보상도 받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해고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노동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며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젊은이가 나타났다. 바로 전태일이었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전상수와 이소선 사이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난 갔던 전태일의 가족은 전쟁이 끝난 1954년 서울로 올라왔다. 이 시기의 전태일은 남대문 초등학교에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자, 초등학교 4학년이던 전태일은 학업을 멈추고 행상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다행히 전태일은 1965년 17살이 되던 해에 청계천 평화시장 내에 있던 수많은 봉제공장 중의 하나였던 상일사 보조원으로 취직하였다. 몇 년이 걸려야 재봉사가 될 수 있던 시기, 손재주가 있던 전태일은 보조원으로 일한 지 일 년 만에 재봉사가 되어 통일사로 직장을 옮겼다.
전태일은 빠른 승진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통일사에서 폐렴에 걸린 여자 동료가 부당하게 해고되는 것을 본 전태일은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사장에게 항의하였다. 하지만 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던 시기였기에 전태일은 오히려 괘심 죄로 해고를 당했다. 이 과정이 너무나 억울했던 전태일은 해고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어느 누구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결국 전태일은 초등학교 중퇴 이후 손에서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교과서가 아닌 근로기준법이 적힌 책을 말이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자신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태일은 21살이던 1969년 ‘바보회’를 조직하였다. '바보회'를 통해 열악한 노동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바보회’는 노동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뭉쳐야 한다는 연대감을 갖게 해 주었다. 이에 청계천의 기업주들은 전태일이 어디에서도 근무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전태일은 생계를 위해 평화시장을 떠나 공사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1970년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삼동회’를 조직하여 과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삼동회’는 노동청, 서울시, 청와대까지 진정서를 제출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당시 경향신문에 소개되면서 교섭단체로 한 단계 발돋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주와 행정기관들은 온갖 불법 행위를 통해 ‘삼동회’의 모든 활동에 제약을 가하였다.
이에 굴복할 수 없었던 ‘삼동회’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이며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외치려 하였다. 그러나 방해로 시위가 이루어지지 못하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결국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전태일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은 죽기 전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노동자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던 이소선 여사에게 전태일의 유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행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전태일의 장례를 이소선이 못 치르게 하면서 학생들이 관심을 보여다. 노동청은 학생들로 인해 노동문제가 사회 이슈로 크게 번질것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무마하기 위해 당시 노동자가 평생 벌어도 만져볼 수 없는 삼천만 원을 이소선 여사에게 주며 전태일의 시신 양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의 동생들에게 삼천만 원을 받을 것인지 물어보았다. 어린 나이의 전태일의 동생들은 이소선 여사의 마음처럼 오빠의 억울한 죽음을 돈과 맞바꿀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전태일을 모란공원 묘소에 안장한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현실과 노동법을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아들의 유언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또한 청계천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모두 자신의 아들과 딸처럼 여겨졌다. 이소선 여사는 1970년 11월에 결성된 청계피복노조 고문으로 추대된 뒤, 가난한 삶 속에서도 노조의 활동비를 책임졌다. 이러한 노력은 노동자들의 가슴을 울리면서 점차 가입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노동자의 가입이 늘어나자 노조는 무료 식당 및 노동 교실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뜻있는 대학생이 교사로 참여하면서 노동자의 의식이 높아졌다. 이런 모습에 기업주만이 아니라 정부도 노조의 활동을 감시하고 규제를 가했다. 그리고 최종 목표로 노조 해산을 계획하였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노동교실의 교사로 활동하던 서울 법대생 장기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노조를 조종했다는 혐의로 7년 형량을 선고하였다. 이에 이소선 여사가 크게 항의하자, 정부는 이소선 여사도 간첩으로 몰아 법정모독죄로 3년형을 내렸다.
이소선 여사가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많은 여공들이 구치소 담 밖에서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면 이소선 여사가 남은 자식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소선 여사는 출소 이후 오히려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소선 여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처우는 개선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정권이 바뀐 80년대에도 노동자의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위한 삶을 살던 이소선 여사는 또다시 감옥에 수감되는 등 힘든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였던 이소선 여사의 활동은 점차 많은 노동자를 하나로 모았고,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2005년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태일을 위해 청계천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전태일 다리)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때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 동상을 어루만지며 안아주었다. 만약 전태일과 이소선 여사 두 분의 희생과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