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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an 23. 2024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어려서 별명이 해동의 증자였어요.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많은 존경을 받는 증자처럼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죠. 인품만 아니라 능력도 뛰어나서 즉위하자마자, 신라의 40여 개의 성을 빼앗으며 많은 기대를 받아요. 그러나 백제 내의 여러 귀족의 갈등을 완전하게 봉합하지는 못했어요. 특히 657년 반대 세력을 대거 숙청하면서, 능력 있는 관리가 쫓겨나거나 죽으면서 여러 혼란에 빠지게 돼요. 


이런 상황에서 660년 6월 신라와 당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해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 13만 명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여 명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향해 진격해왔어요. 이 소식에 의자왕은 신하들과 모여 대책을 마련해요. 당과 신라군 중 어디를 먼저 공격할 것인가? 전투를 벌인다면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탄현과 백강 입구를 봉쇄하여 지구전을 펼칠 것인지 아니면 탄현과 백강으로 유인하여 단박에 승부를 낼 것인지를 두고 말이에요.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백제 영토로 들어와요. 이에 의자왕은 소수의 병력으로 약한 신라군을 저지하고, 당군을 막는 데 총력을 펼치기로 결정해요. 이를 위해 계백에게 5천의 병력을 주어 신라군을 막게 하면서, 일본과 각 지방에 군대 파병을 요청해요. 하지만, 계백이 황산벌에서 여러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끝내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막아내지 못해요. 이때 어린 화랑 관창의 활약이 널리 알려져 있죠. 또한 당나라 군대를 좁은 금강으로 끌어들여 맞서 싸우던 백제군도 대패하고 말아요.                    


지방에서 군대가 올라오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와 당나라에 모든 군대를 잃은 의자왕은 급하게 웅진으로 피신해요. 의자왕은 올라오는 지방군을 재편성하여 맞서 싸우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자신했어요. 당과 신라가 대규모의 군대를 끌고 왔지만, 식량 등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만큼 시간은 백제의 편이라 생각한 거죠. 의자왕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리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어요. 웅진을 책임지던 예식진이 배신하여,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의자왕을 포로로 바쳤거든요. 그로 인해 백제는 660년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백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일어나게 돼요. 의자왕이 중국으로 끌려갔지만, 백제와 일본에는 여전히 백제 왕실 사람과 백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이 남아있었거든요.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면서, 사비에는 유인원이 통솔하는 1만 명 정도의 당나라 군대와 신라군 7천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어요. 이에 백제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은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하면서 주류성(한산으로 비정)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일으켜요. 흑치상지도 임존성(예산)을 근거지로 삼고 부흥 운동에 힘을 보탰어요. 여기에 일본이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파병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마치 성공하는 듯 보였어요. 그러나 복신과 도침 그리고 부여풍 등 지배계층의 대립과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투항해요. 여기에 백제와 일본 연합군이 백강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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