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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28. 2024

연산군의 만행을 고발하다

세조는 여승이 된 과부와 외로운 여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창덕궁 뒤편에 정업원이라는 사찰을 세웠다. 이후 정업원은 세조와 정희왕후, 인수대비 등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큰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업원의 내력에 상관없이 늙은 여중은 내쫓고, 젊고 아름다운 여승 7~8명을 겁탈했다. 연산군에게 치욕을 당한 여승들이 모두 목을 매 자살하면서 1504년(연산 10년), 정업원은 철폐되었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성종의 후궁 엄숙의와 정숙의, 그리고 할머니 인수대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들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어머니의 죽음에 항의하고 싶었던 연산군은 인수대비 앞에서 칼을 휘두르며 처용무를 추는 위협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연산군은 엄숙의와 정숙의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을 불러 자루안에 든 그들의 모친을 때려죽이게 했다. 그리고 두 여인의 시신을 젓갈로 담가 산과 들에 뿌렸다. 연산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끌고 인수대비에게 찾아가 인수대비를 농락했다. 이 모습에 크게 노한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혼내자, 격분한 연산군은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았다.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한 달 뒤 죽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유흥을 위해 도성 근처의 민가를 모두 헐어버리고 백성을 강제로 쫓아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금표를 세워 어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금표를 넘어 들어오는 경우에는 이유를 따지지 않고 목을 베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매달았다. 또 터전에서 쫓겨난 백성들이 억울한 마음을 담은 한글 벽서를 한양 곳곳에 붙이자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도 겁탈했다. 박씨는 남편과 사별한 후, 연산군의 큰아들을 돌보기 위해 궁궐에 자주 출입했다. 연산군은 박씨에게 고마움을 핑계로 쌀과 면포 등 많은 재물을 하사하며 박씨와 잦은 만남을 가졌다. 그러던 중 연산군이 박씨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졌고, 박씨는 치욕에 병이 들어 죽었다. 박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박씨의 동생 박원종이 연산군의 만행에 분을 참지 못하고 “나가 죽어라.”라는 말에 박씨가 살했다는 말도 있지만, 박씨가 연산군의 겁탈로 아이를 갖게 되어 자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연산군의 만행은 이외에도 많이 기록되어 중종반정의 명분을 충분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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