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감사의 추천을 받은 신동
19세기 말 조선이 열강의 침탈에 무너져갔다. 이 시기 평안도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안창호, 조만식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외에도 기억되지 못하는 평안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 장도빈 선생이 있다. 장도빈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것은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세도정치로 혼탁해진 세상에서 힘들어하던 민중을 어루만지기 위해서였다. 장도빈은 어려서부터 이런 가풍을 교육받았다. 특히 5살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여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영민했던 장도빈은 어르신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장도빈의 올곧은 마음과 능력은 평안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재주를 아까워하던 평안감사는 조선의 인재를 양성하는 한성사범학교에 12살의 장도빈을 추천하여 입학시켰다. 국가에서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서울에 설립한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한 장도빈은 넓은 세상에서 많은 애국지사를 만나며 식견을 넓혀갔다. 1906년 18살의 나이로 학교를 졸업하는 장도빈에게는 교사로서 지식을 나누어준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어려운 시국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더 하고 싶었다.
고향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스스로 배움을 익힐 수 있게 되자, 장도빈은 나라를 바로 잡는 정치가가 되고자 서울로 상경했다. 보성전문학교 법과에서 공부하던 그에게 어느 날 박은식이 찾아와 <대한매일신보>의 논필진이 되어 많은 이들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이때가 1908년 장도빈의 나이 21살로 장도빈의 능력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신채호와 함께 애국심을 고취하는 논설을 기고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대한매일신보>가 영국인 베델이 사장으로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도빈은 언론인으로서만 애국심을 고취하려 하지 않았다. 본인부터 나라를 위한 일에 적극 나섰다. 우선 신민회에 가입하여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웠다. 신민회가 안창호, 양기탁 등 큰 인물들이 모여 국권 회복을 위해 국내에 학교와 회사를 세우고,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는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만큼 누구나 쉽게 입단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20대 초반에 불과한 장도빈이 신민회의 비밀 장부를 보관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많은 애국지사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발해 역사에 관심을 갖다.
장도빈의 애국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은 눈엣가시였던 <대한매일신보>를 폐간하기 위해 베델과 양기탁을 구속했다. 그리고는 베델이 죽자마자 일본 기관지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대한매일신보>가 더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판단한 장도빈은 오성학교(협성학교 후신) 학감으로 취임해 학생을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더불어 역사를 바로 정립하는 것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으며 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산학교가 일본에 의해 폐교되자, 장도빈은 정주의 오산학교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1911년 일본이 신민회를 해산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105명의 민족지도자를 가두자, 장도빈은 북간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북간도에서 국사를 가르치던 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에서 함께 글을 썼던 신채호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거처를 옮겼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이곳에서 장도빈은 신채호와 함께 다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썼다. 러시아인 주코프를 발행인으로 내세워 일본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권업신문>에 실린 장도빈의 논설은 나라를 잃은 많은 한국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연해주에서의 삶은 장도빈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 민족에게서 멀어졌던 연해주는 과거 부여, 고구려, 발해의 터전이었다. 그만큼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었다. 이것을 목도한 장도빈은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6년 고구려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하는 <국사(國史)>를 발간하였다. 이후 남북국 시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역사 교과서에 남북국 시대 용어를 사용하여 동북공정으로부터 고구려와 발해를 지켜내는 노력이 가능하게 된 것은 장도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안창호의 미국 초청에 응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장도빈은 결국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나라를 되찾는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3·1운동 이후 일본의 기만적인 민족 분열 통치의 하나로 신문사를 창간할 수 있게 되자, 장도빈은 동아일보 발행을 얻어냈다. 신문사를 양도해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장도빈은 그전부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분야의 책을 집필했다. 그 결과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동명왕>, <조선사> 등 역사 서적과 <서울>, <학생계> 등 학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잡지가 발행되었다.
일본은 언론인이자 교육자로 존경받는 장도빈을 어떡하든지 친일파로 만들고 싶었다. 1930년대 민족말살정책 아래 한국인을 식민지인으로 살아가도록 순응시키는데 장도빈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러나 장도빈은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다. 당시 많은 민족지도자가 변절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기나긴 인고 끝에 그토록 원하던 광복을 맞이하지만, 장도빈은 고향에 머무를 수 없었다. 사회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월남한 장도빈은 <민중일보>를 창간하여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하지만 1949년 화재로 <민중일보>를 더는 발간하기 어렵게 되자, 윤보선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넘겨주었다. 장도빈의 활동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국대학과 단국대학 초대 학장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육과 언론계의 큰 어른으로서 한시도 멈추지 않았던 점을 인정하여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