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우리는 양난이라고 불러요. 이것은 전쟁의 규모가 커서 많은 사람이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는 토지가 황폐해져 가족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것은 국가 운영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조세수입이 줄어들면서 전후 복구를 할 비용을 마련하지 못했거든요. 결국 국가는 경제활동에 필요한 기반 시설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그로 인해 경제활동 하기 어려워진 사람은 조세를 납부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며 양난 이후 조선 백성은 매우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어요.
물론 조선 정부가 아무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영정법, 균역법, 대동법 등 여러 조세개혁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도와주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영정법과 균역법은 백성의 세금을 줄여주는 정책이지만, 부족해진 세수를 다른 명목으로 다시 거두면서 백성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크게 주지 못했어요. 그러나 대동법은 달랐어요. 소유한 토지의 면적에 따라 토산물이 아닌 화폐로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대동법은 양난 이후 조선이 무너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어요. 화폐로 조세를 납부하면서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더 세금을 내게 하면서 조세 형평성이 맞추어졌거든요. 정부도 더 많은 세수를 거두어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국가 경영을 할 수 있게 되었고요.
대동법이 조선을 살린 경제정책이지만, 자리 잡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시행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의 반대여서 전국에 정착되는데 100년이 걸렸어요. 대동법의 시작은 광해군 때인 1608년으로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서만 적용한 것에 기인해요. 이것은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정책은 아니었어요. 이이가 공물을 쌀로 납부하자는 대공수미법 이후 광해군 때에도 호조참의 한백겸 등 여러 관료들이 주장했지만, 번번이 반대에 가로막혀 시행되지 못했던 거였죠.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정착되는 데에는 효종 때 재상이던 김육(1580~1658)의 공이 컸어요. 김육은 왜 적극적으로 대동법 시행을 추진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젊은 시절 경험에 기반해요. 김육은 성균관에 재학하던 중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문묘에 종사해달라고 요청한 일로 북인의 미움을 받아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해요.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된 그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10년 동안 농사를 짓고 숯을 구워 팔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며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곤궁한지를 깨닫게 돼요.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면서 문과에 응시하여 관료가 된 김육은 힘들어하는 백성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치고자 노력했어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서 대동법을 시행하며 인조의 신임을 받았지만, 세자빈 강씨가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고 주장하는 인조의 편을 들지 않아 조정에서 내쳐지게 됩니다.
인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효종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어요. 70이 넘은 나이지만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해 일하려는 김육을 반드시 자기 곁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김육을 임시 예조판서로 불러 인조의 장례를 맡기는 방식으로 조정에 불러들인 다음, 곧바로 우의정에 앉혀요. 김육이 우의정이 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대동법 확대를 건의하는 일이었어요. ‘대동법에 관한 모든 것을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며 강력하게 주장하자, 이조판서 김집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는 강수를 두며 대동법 시행을 강하게 반대했어요. 이에 맞서 김육도 사직서를 제출하며 대동법 시행을 촉구했어요. 관료들이 둘로 나뉘어 극명하게 대립하며 국론이 분열되자, 효종은 대동법 시행을 주저하다가 결국 김집의 손을 들어주고 말아요. 대동법 시행을 반대하는 관료들이 더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효종은 이 사건 이후 김육의 충정을 가슴 깊이 느끼게 돼요. 국정을 파악하고 자신이 구상한 정치를 펼 수 있게 된 효종은 김육을 좌의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해요. 그리고 김육의 손녀를 세자빈으로 간택하며 힘을 실어줘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김육은 즉시 대동법과 화폐유통을 위한 정책을 주장하며 시행되는 데 전력을 기울여요. 대부분 재상의 자리에 오르면 새로운 정책을 건의하기보다는 판단하는 일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70세 넘는 영의정 김육은 백성에게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효종에게 과감히 제안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어요.
조선왕조실록에서 김육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과 의견이 맞지 않자,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임금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김육과 같이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