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국가를 경영하는 데 있어 신하들과 백성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한 군주예요. 신하들도 자기 의견을 밝혀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 만큼 언제든 자유롭게 건의했어요. 이때마다 세종은 올라온 건의를 모두 접수하여 살피고는 도움이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다시 물어보며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답니다. 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제안이면 왜 받아들일 수 없는지를 설득하고자 노력했고요. 그래서 세종 때 엄청나게 많은 문물이 만들어지고 발전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유독 생각하는 방향이 달라서 세종을 힘들게 한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이조판서 허조(1369~1439)랍니다.
허조는 태조 이성계를 도우며 조선이 건국하는 데 일조한 이후 정종과 태종까지 3명의 왕을 성심껏 보필했어요. 허조는 제1, 2차 왕자의 난 등으로 혼란했던 상황에서도 반드시 옳은 일이라 생각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강직한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태종이 즉위한 초창기에는 사헌부 관원으로서 강직한 발언을 이어가며 명령을 따르지 않는 태도로 완산판관으로 좌천되기도 해요.
훌륭한 지도자는 모든 명령과 지시에 YES라고만 대답하며 순응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아요. YES만 하는 사람 대다수는 간신이 되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힘들게 하는 일을 스스럼없이 하는 일을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거든요. 또한 훌륭한 지도자는 자기 의견에 NO라고 말하는 사람을 곁에 두어서 국가에 보탬이 되는 정책이 수립되고 시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의견을 듣는답니다. 훌륭한 지도자였던 태종도 NO를 말하는 사람을 옆에 많이 두었죠. 그중의 한 명인 허조를 이조정랑으로 임명하여 조정에 불러들인 다음 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깁니다.
태종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세종도 허조를 곁에 두고 맡은 도움을 받았어요.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이조판서가 된 허조가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와 지방 수령은 특수한 기술이나 경험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너무 잦은 인사 교체는 업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주어 국가와 백성에게 피해를 주니, 이곳의 관료들은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라며 특수 요직을 맡은 관료들의 잦은 인사이동을 막는 구임법을 제안해요. 능력 있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효율성 있는 업무를 강조하던 세종은 허조의 의견을 적극 지지하며 구임법을 즉시 시행시켜요.
하지만 세종에게 허조는 매우 어려운 신하이기도 했답니다. 하루는 세종이 관노였던 장영실을 중용하고자 정5품의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주려고 인사권을 총괄하는 이조판서 허조를 불러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세종은 당연히 허조가 이해하고 지지해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으로 임명할 수 없습니다.”라며 NO를 외치는 거예요. 장영실의 능력과 재주가 꼭 필요했던 세종은 이조판서 허조가 반대하자, 병조판서를 불러 장영실에게 관직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지를 다시 물어요. 병조판서는 허조와는 달리 과거의 사례를 제시하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변했죠. 이에 용기를 얻은 세종은 허조를 불러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여전히 허조는 찬성하지 않았어요. 결국, 세종은 여러 다른 대신들을 불러 동의를 구한 끝에야 장영실을 어렵게 상의원 별좌로 임명할 수 있었답니다.
허조는 왜 이토록 세종의 뜻에 반대했을까요? 그것은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리학적 질서를 뿌리내리게 하려면 신분제만큼은 절대 뒤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신분제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의 인권이 존중받아야 하는 오늘날에는 허조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지금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허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만 보기 어렵기도 해요. 또한 허조가 NO라고 외친 또 다른 이유는 국왕이 독단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또 하나의 사례를 더 살펴볼까요. 허조는 지방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부민고소금지법을 건의해요. 부민고소금지법이란 아전이나 고을 사람이 수령을 고소해도 살인 등 강력 범죄가 아니면 불문에 부치자는 법안이에요. 조선 초기까지 지방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했던 만큼, 수령의 권한을 높여주자는 허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국에 시행토록 해요. 하지만, 부민고소금지법으로 인해 수령의 비리가 늘어나고, 고을 사람들의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는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세종은 관찰사가 수령을 감독하도록 하는 한편,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부민고소금지법을 수정해요.
이 소식을 들은 허조는 즉시 세종을 찾아가 “백성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접수한 뒤 관리의 오판을 처단하는 것이 존비의 구분을 없애까 두렵습니다. 바라온컨대 소신이 건의한 것을 따르게 하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세종은 허조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지만, 백성이 억울함도 말하지 못하게 막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라며 되돌려보내요. 그리고는 조용히 옆에 있던 신하에게 “허조는 고집불통이야.”라고 하소연했다고 해요. 그렇다고 세종이 허조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았어요.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그대로 처리하되, 소장 때문에 관리를 처벌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를 내려요. 이런 점을 보면 세종과 허조는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 보다 나은 정책을 만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죠. 세종이 성군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허조처럼 자기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자유롭게 NO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