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이성계는 신의왕후와 신덕왕후 두 왕비에게서 8명의 아들을 두었어요.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5번째 아들 이방원이었죠. 이방원은 17살의 나이에 고려 문과에 급제한 유일한 아들이었으며, 사냥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보이며 문무 모두 능한 인물이었어요. 그만큼 이성계의 수족이 되어 조선을 건국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조선 건국에 어떤 도움을 주었나요?
가장 큰 일은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와요. 이 기회를 이용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겠다고 생각한 정몽주는 정도전을 감금시키고, 조준 등 여러 명을 유배 보내요. 조선 건국을 바로 코앞에 둔 상황에서 모두 무너질 것이 우려되었던 이방원은 급히 해주로 달려가 부상당한 이성계를 가마에 싣고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이성계 집을 방문해요.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서 주고받은 두 편의 시가 매우 유명하죠. 이방원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로 답하죠. 결국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를 보내 정몽주를 죽입니다. 만약 이방원이 이성계를 개경으로 데려오지 않았거나,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면 조선 건국이 어려워졌거나 힘들었을지 모르죠.
조선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나요?
아니요. 오히려 왕자라는 이유로 공신이 되지 못해요. 더 나아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방원이 가진 사병을 없애고자 했어요. 무엇보다 이복동생이던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이방원은 매우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제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 거죠. 그래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를 끌어내리고 정도전과 방석을 죽이게 됩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성계와 이방원은 끝까지 화해하지 않았나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천륜이라고 하죠. 많은 부모님이 공감하시겠지만 쉽게 끊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잖아요.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도 완벽하게 좋아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평생 철천지원수로 살아갔던 것도 아니에요. 우선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에요. 제2차 왕자의 난 때 넷째 이방간이 이성계를 찾아가 이방원을 제거하자고 주장하지만, 이성계는 오히려 이방간을 꾸짖어요. 이때 많은 사람이 이방간에게 명분이 없음을 알고 돌아서게 되었죠. 반대로 이방원은 이 일로 명분을 얻으며 승리할 수 있었고요.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개선이 되어갔어요.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도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가 좋아졌음을 보여줘요. 이성계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고향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방원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미운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렇다면 이성계가 권좌를 빼앗은 미운 이방원이지만,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협조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리고 이방원도 이성계의 능을 조성할 때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떼가 아닌 이성계의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풀로 봉분을 덮으며 효를 다해요. 이런 점을 본다면 둘은 말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서로를 인정하며 화해한 것이 아닐까요. 나와 뜻이 맞지 않더라도 국익을 우선으로 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둘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