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국왕으로 즉위하기 어려웠다면서요?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건국 초가 아니면 국왕으로 즉위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또한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태종은 두 번의 왕자의 난을 겪으며 힘들게 국왕이 되었지만, 아들들이 자신처럼 싸우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찌감치 10살의 양녕대군을 세자로 임명하며 후계자 수업을 시켰어요. 당연히 셋째였던 세종은 왕이 될 기회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국왕이 될 수 있었나요?
부모의 기대에 맞춰 자라는 아이들이 없듯이 양녕대군은 성인이 되면서 공부를 게을리합니다. 또한 여러 여성들을 만나며 문제를 일으켰어요.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양녕대군이 곽선의 첩 어리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진 거죠.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벌을 내리자, 양녕대군은 “첩 하나를 금지하다가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겠다.”라고 글을 올려요.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을 넘어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였죠. 태종은 이때 마음을 굳혔던 것 같아요. 양녕대군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왕으로 즉위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가장 우선은 충녕대군의 성품과 자질에 기인하죠. 세종은 어려서부터 학문 탐구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남달랐어요. 너무 책을 많이 읽어 건강이 나빠진 세종을 위해 태종이 책을 읽지 못하도록 압수할 정도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에 나올 이야기죠. 그 와중에도 세종은 <구소수간>이라는 책을 숨겨놓고 천 번 이상을 읽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늘 책을 손에 잡으면 백번 이상 읽으며 공부하는 노력파이면서 천재이기도 했어요. 조숭덕이라는 신하가 소리 내 읽은 책의 내용을 듣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다시 읊었으며, 수많은 신하의 이름과 경력 그리고 가문까지 모두 외웠다고 해요. 또한 한 번 본 얼굴은 몇 년이 지나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리해 보면 세종은 재능과 열정 그리고 노력 이 모두를 가진 인물이었으니. 태종이 후계자로 삼은 것이겠죠.
세종이 즉위하는 데 걸림돌은 없었나요?
가장 큰 걸림돌은 양녕대군을 다음 국왕으로 생각하던 신하들이었어요. 10년이 넘도록 세자로 있던 양녕대군 앞으로 출세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들도 미래를 위해 오랜 시간 기다리며 투자한 것인데, 갑자기 셋째였던 충녕대군이 국왕으로 즉위한다.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는데 말이죠. 그렇지 않더라도 적장자의 원칙 즉 왕비에게서 태어난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료들도 많았어요. 대표적인 예로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는 양녕대군을 쫓아내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는 일에 크게 반대했습니다.
즉위 초 세종에게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었나요?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을 겁니다. 갑작스러운 국왕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관료들, 실권을 쥔 채 물러난 상왕 태종, 폐세자된 양녕대군과의 불편한 관계, 무엇보다 국왕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국정운영을 펼칠 수 없는 환경.
그럼에도 세종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 되었죠. 이 모든 것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과오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자기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과정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종대왕은 주어진 환경이 좋아서 훌륭한 성과를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종은 누구 탓도 주변 환경 탓도 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백성을 위해 달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서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겨낸 세종이기에 존경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