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하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숙종은 여자에게 휘둘렸던 국왕으로 기억하는 게 맞는 건가요?
과거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드라마가 많이 제작되었죠. 당대 최고 미인이라고 불리는 여배우들이 장희빈 역을 맡았어요. 대표적으로 김지미,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김혜수, 김태희들이 있었죠.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숙종은 장희빈에게 휘둘리는 연약한 왕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숙종은 여인에게 휘둘리기보다는 매우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이죠.
조선시대는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숙종은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즉위하지만, 예외적으로 수렴청정 없이 직접 국정을 이끌었어요. 이때 효종부터 현종 때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송시열이 있던 만큼, 쉬운 출발이 아니었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중학교 1학년에 불과한 아이가 국정을 이끈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했죠.
그렇다면 강력한 국왕으로의 모습을 보여준 첫 번째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경신대출척이라고 불리는 경신환국입니다. 여기서 환국이란 국왕이 가진 강한 힘 중의 하나인 인사권을 행사해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붕당을 몰아내고, 상대 당을 중용하는 일을 말합니다. 1680년 숙종이 20살이 되어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일이죠. 당시 국정을 주도하던 남인 허적이 할아버지인 허잠에게 시호가 내려지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크게 열어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허적의 서자였던 허견이 병조판서 김석주와 숙종의 장인 김만기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로 인해 서인 출신 관료들이 잔치에 대거 불참했어요.
그럼에도 잔치는 예정대로 열렸어요. 잔칫날 비가 많이 내리자, 숙종은 왕실에서 비를 막는 데 사용하는 천막인 용봉차일을 허적에게 보내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이미 허적이 숙종에게 아무 보고도 없이 용봉차일을 빌려 간 상황이었죠.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왕을 무시했다는 생각에 크게 화를 내며, 남인의 힘을 약화시켜 붕당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우선 철원에 귀양 가 있던 서인 김수항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남인의 중심에 있던 이조판서 이원정의 관직을 삭탈하죠. 그리고 훈련대장에 김만기, 총융사에 신여철, 수어사에 김익한을 임명하면서 서인에게 군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얼마 후 허견과 숙종의 5촌이던 복선군이 역모를 꾀했다는 고발이 올라옵니다. 아직 20살에 불과했던 숙종이기도 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국정을 이끌려던 숙종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크게 걱정되고 우려되었을 겁니다. 남인의 세력을 약화시킨 지 얼마 안 된 직후였으니까요. 그래서 허견과 복선군 3형제를 역모죄로 처형하죠. 또한 이들과 관련된 100여 명을 처벌합니다. 이것을 경신환국이라고 부르는데, 남인이 몰락하는 순간이었죠.
숙종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역모를 준비했다고 하니 경신환국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이후로 신하들은 숙종의 말을 잘 들었나요?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죠. 정권을 잡게 되면 그 안에서도 다시 갈라지는 모습을 우리는 역사에서 종종 만나게 됩니다. 서인도 그랬죠. 회니시비라고 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여기에는 송시열이 개입되어 있었죠. 송시열과 윤선거는 김장생 아래에서 같이 공부하던 막연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윤휴를 다르게 평가하면서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됩니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의 성리학을 따르지 않고 다르게 해석했다면서 사문난적이라고 비판했고, 윤선거는 반대로 윤휴를 옹호했죠. 송시열이 윤선거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자, 윤선거는 말을 아끼며 뒤로 물러납니다. 그렇게 둘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현종 10년 때 윤선거의 아들 윤증이 아버지의 묘문을 써달라고 송시열에게 부탁합니다. 송시열은 묘문을 쓰기 위해 윤선거의 글들을 살피다가 윤휴를 높이 평가하는 편지를 발견하게 돼요. 자신의 의견에 동조한 줄 알았던 윤선거가 죽을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청군을 피해 도망친 사실을 거론하며 묘문을 형편없이 적어주죠.
윤증의 입장에서는 매우 화가 났겠어요. 자신을 아버지의 치부를 거론하며 모욕했으니까요.
맞아요. 윤증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좇았다고 비판하는 편지를 씁니다. 하지만, 차마 스승이기도 한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제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뜻을 접지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요?
아니요. 숙종 때 최신이라는 사람이 윤증의 송시열에게 쓴 편지를 문제 삼아요. 윤증이 스승을 모욕하고 배반했으니 처벌을 내려달라고 숙종에게 말하거든요. 서인의 존경을 받던 송시열이었던 만큼 윤증의 편지는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송시열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것은 서인이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모두가 송시열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윤증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때 윤증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소론이 되고, 송시열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노론이 됩니다.
숙종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렸나요?
숙종은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1684년 제기된 문제가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자, 1716년에 송시열을 두둔하며 윤증을 유학에 정통하고 바른 선비가 아니니 유현으로 대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거군요. 그런데 남인도 남아있잖아요.
다시 숙종의 20대로 돌아가 볼까요.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일당전제화의 모습을 보이자, 숙종은 다시 한번 붕당을 길들이기 위한 칼을 꺼내 듭니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신하들을 몰아붙일 수는 없었겠죠.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인현왕후 대신 후궁이던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삼겠다며 포문을 엽니다. 원자로 삼는다는 것은 왕의 장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뜻하는 거죠.
인조반정으로 국정을 장악한 서인들은 무조건 왕후는 서인 가문에서만 나오도록 해왔어요. 그러면 새로 즉위하는 국왕도 결국은 서인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벗어나기 힘들 테니까요. 그런데 서인 출신 왕후가 아닌 여인이 낳은 아들이 국왕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죠.
드디어 장희빈이 등장하네요. 장희빈은 어떤 여인인가요?
장희빈의 이름은 옥정이에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비록 신분이 중인으로 낮았지만, 집안 형편은 매우 좋았어요. 조선시대 역관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을 따라가면서 무역을 담당했기에 매우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거든요. 장희빈의 당숙이던 장현은 당대 최고의 거부로 알려지기도 했죠.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온 장희빈은 21살이 되던 해에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미움을 받아 궁에서 쫓겨나죠. 하지만, 장희빈을 잊지 못하던 숙종은 명성왕후가 죽자, 장희빈을 궁으로 불러들였고 아들을 낳은 거죠. 이때가 숙종의 나이가 28살이고, 인현왕후의 나이가 21살이었어요. 당연히 서인들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낳은 원자로 삼으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숙종에게 맞섰어요.
그 이후는 다음 시간에 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