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않다, 절대로
특정 관심사에 꽂히면 이외의 것에 큰 신경을 쏟지 못하는 성정 탓에 선인장 다육이를 두 아이나 하늘나라로 보낸 전력이 있는 나는 반년 전 이직을 했다. 새 환경과 업무 적응에 모든 열과 성을 쏟느라 연말이 되어서야 발견한, 원래도 그리 튼튼치 못하던 방치된 브런치 다육이 가시가 내 죄책감을 찔러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괴사 직전인 브런치를 꾸준히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꽤 서러운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직장 생존기] 사람 때문에 힘들고 우울할 때'를 찾아 온다든 것. 가끔 들러 조용히 올라간 조회수를 보고 있자면 그들의 심경이 잠시나마 읽혀 마음 한편이 먹먹해진다.
내 전 직장은 국내에서 제일 크다는 광고회사였다. 사실 적성에 맞고 더 잘하고 싶던 전략 포지션으로 지원을 했었는데, 내 경력기술서와 포트폴리오를 본 전혀 다른 팀의 '그 자'가 나를 납치(?)하고자 면접 미팅을 급하게 잡았었다.
엥?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새로운 경험에 목말랐던 나는 으레 면접자들과 같이 나 자신을 속였다. 사실 내가 조금 더 현명했다면 그때 깨달았을 것이다. 다리가 아플 때 의자를 사면 안 되고 외로울 때 사람을 만나면 눈이 어두워지듯 마음이 급할 때 이직을 하면 좋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입사를 하자마자 두 가지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그중 하나는 메인을 떠맡았고, 이틀 만에 기존 멤버 다섯과 각자 준비한 아이디어를 발표해야 했다. 프로젝트가 완벽히 파악되지 않았고 시간은 촉박했지만 귀가 후 틈틈이 잔업까지 하며 준비했다. 첫인상은 중요하니까, 그리고 나를 입증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준비한 회의 시작 전, 그런데 '그 자'의 말이 좀 이상했다.
"야, 새로 온 너부터 해봐. 얼마나 잘하나 보자"
아니, 절반 이상이 후배인 상황에서 대놓고 널 시험해 보겠다는 말투라니. 살짝 언짢고 부담을 안은 채로 발표를 시작했다. 하지만 과거 거친 환경들에서 단련된 덕분일까. 아이디어 발표가 끝나자 모두가 '와' 하고 감탄을 터뜨려 주었고, 둘 정도는 박수까지 쳐 주었다. 오만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던 '그 자'도 놀랐는지 "이거 그냥 이대로 제출해도 되겠는데..?"라며 웅얼거렸다. 사실 좀 통쾌했지만, 이 자와 함께하게 될 날들이 막연히 그려지며 비릿한 뒷 맛이 올라왔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던 탓인지 곧 속한 본부에서 가장 매출이 큰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는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가 크지 않아 모든 의사결정을 나에게 일임했다. 사실 간섭 없이 자율성을 가지고 일하는 건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가 프로젝트에 필요한 인력을 제대로 붙여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객사와 다섯 명의 투입인력을 계약했는데 실제 일하는 건 나와 후배 한 명, 단 둘 뿐이었다. 내가 종종 벅차다는 티를 내도 '그 자'의 업무 이해도가 전무하니 개선은 바랄 수 없었다.
이런 고충에 더해 날 더 괴롭게 했던 것은 '그 자'가 팀원들에게 행하는 만행들이었다. 내가 직접 당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친한 동료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기 힘들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 자'가 가진 문제 유형은 다음과 같았다.
1. 업무적 역량 부족
2. 리더십 역량 부족
3. 인격적 역량 부족
내가 정의하는 업무적 역량은 다음과 같다.
[현재 상황과 문제점을 명확하게 파악하여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능력]
이 역량이 부족하면 본질과 거리가 먼 쓰잘데 없는 것에 집중하느라 중요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긴커녕 더욱 키우는 사태가 벌어진다. 전문 언어로 '삽질'을 하게 되니 번아웃이 쉽게 찾아오고, 상급자가 이런 성향일 경우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리더십 역량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다.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달성함에 구성원의 니즈와 동기부여 요소를 파악해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
리더의 리더십이 부족하면 구성원은 자신과 조직을 분리하기 쉽다. 내가 속한 조직이 왜, 무엇을 위해 이 일을 벌이는지 납득이 가지 않으니 예기치 못한 야근 등으로 자신의 삶을 침해당하면 쉽게 화가 난다. 또 자신을 소모품처럼 느끼기 쉬우며, 회사에 대한 충성도와 헌신도가 떨어진다.
인격적 역량은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최근의 경험으로는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음 편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닮고 싶게끔 만드는 능력]
인격적인 부분이 갖춰지지 않은 리더는 구성원을 불안하고 눈치 보게 만들며 신뢰하기 힘들다. 속이 가늠이 안 되니 어디까지 맞춰야 할지 신경 쓰느라 감정과 에너지 소비가 심하다. 따라서 정작 집중해야 할 업무에 집중하지 못해 능률이 떨어지고, 또 리더에게서 닮고 싶은 점을 찾기는 커녕 이 조직에 오래 있으면 나도 저렇게 돼 버릴까 두려워 조직에 대한 소속감까지도 저하된다.
하늘이 사람에게 허락하는 능력이 다 다를진대, 또 당신이 누구에게나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다 믿는 열려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세 가지 역량이 고루 부족한 인간이 존재하겠냐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당신을 존중한다. 나도 '혹시 내가 이상한 걸지도 몰라', '분명 좋은 구석이 있겠지'같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혔으니까. 하지만 '그 자'를 아는 수많은 동료 및 협력사 사람들과의 이야기 끝에 결론내린 그의 장점은 딱 하나였다.
자신의 만행을 견뎌낼 만한 착한 사람들만 잘 골라 뽑는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만큼 착하지 못해 뛰쳐나온 것이겠지.
사실 회사에서 힘든 시기를 겪던 와중, 사내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받다 갑자기 떠올라 붙들고 버텼던 문장이 있다.
"병X에게 인정받으면 너도 병X이다."
이 문장을 주변 고통당하는 지인들에게 공유했더니 큰 위로가 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유유 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지. 살기 위해 이런 합리화까지 해 냈던 내 자신이 짠하기도 하지만.
조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걱정이 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을 텐데, 옮겨서도 힘들면 어쩌지?'. 이런 걱정에 대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절대 다 똑같지 않다고. 지금까지 다섯 번의 조직이동과 이직을 포함, 지옥을 벗어나고자 한 나의 노력은 모두 보상받았었다고.
지금 나는 용기를 내어 익숙했던 광고회사를 떠나 한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몸담고 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좋은 동료들의 인정과 지지 속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상사 분들이 업무적으로도, 리더십 측면도, 인격적으로도 뛰어난 역량을 지니신 분들이라든 거다. 이 만으로도 사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평가 시즌에 예상치 못한 파트너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족이지만 달은 차면 기울고, 꽃은 피면 진다 했나. 세상 참 얄궂게도 윗 사람에게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고 도망쳐 온 이곳에서, 이제 그 잣대를 나 스스로에게 가져다 대야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경험이 전무한 프로젝트에 갑자기 팀장으로 투입되어 나의 역량에 대해 생각하는 날들이 늘어났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님들을 팀원으로 두고 스스로의 리더십과 인격적 역량에 관한 걱정을 하고는 한다. 언젠가 팀원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내 역량을 엄청 비웃을지도.
미래의 나에게 조금 덜 창피하기 위해 내년에도 늘 언더독의 마음이고 싶다. 그리고 윗 사람 때문에 지금도 아파하는 과거의 나인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