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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딴따라 Oct 28. 2022

집 나간 마음

조금 쉬었으면 좋겠어

기후 위기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하늘이 눈부시다. 몇 년 전 방문한 호주의 바다와 하늘은 푸름으로 무장한 쌍둥이였다. 시선을 따라 하늘은 바다가 되고 하늘이 되기를 반복했다.

“예쁘죠? 구멍 난 오존 때문이에요. 오존층이 없으면 하늘이 아주 가까이 보이거든요. 대신 여기선 모자와 선크림 없인 나가지 않아요. 피부암에 잘 걸리거든요”

가이드의 말에 현타가 온다. 아름다운 건 위험하다고 했던가.     


뜨거운 증기에 젖은 원두커피의 풍미가 좋지만 믹스커피의 달콤쌉싸롬이 간간이 당긴다. 뜨거운 물을 타고 커피 봉지로 휘휘 저으니 몸에 해롭다며 직원이 말린다.

“이렇게 해도 100살까지 산대요. “

수명이 길어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이젠 목숨도 오롯한 개인의 것이 아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죽지 못해 사는 생이 될까 겁난다. 가끔 인스턴트를 먹어줘야 기대 수명과 연장 수명 어디쯤에서 합의가 될 듯싶다. 나는 제 속도로 달리는데도 매번 ‘여전히 청춘입니다’라고 하면 어쩐담.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나이, 오십이다. 불같은 젊음이 막 반환점을 돌았다. 지나온 뒤를 돌아보고 ‘그때 그랬군’ 되새김질할 여유가 생겼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썰을 풀기엔 아직 이른데 인생의 여독은 느껴진다. 생의 종료 휘슬이 울리지 않았으니 다시 달려야 하건만 일단 부딪쳐보자며 마냥 호기로울 수 없는 나는 오십의 갱년기를 앓는다.        

조금 쉬었으면 좋겠어

운이 좋아 휴직이나 장기 휴가를 얻으면 다행이지만 그런 행운이 흔하지 않다. 지금 바라는 '쉼'은 일의 ‘멈춤’과 살다의 ‘게으름’이다.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담금질하지 않고 설렁설렁 살라 방목하는 일이다. 삶의 둔덕을 오르내리느라 수고했다는 포상이다.

 

사람 무더기에서 떨어져 나와 불(火) 멍, 물(水) 멍처럼 인(人) 멍을 하면서, 미운 사람의 미운 짓 대신 고운 사람의 이쁜 짓을 부지런히 떠올린다. 소란스러운 생각으로 잠자리가 뒤숭숭할 때 내일 피곤하면 어쩌나라는 걱정 없이 밤새 좋은 글을 읽고 싶다. 날이 새도록 정성껏 닦아 반질반질해진 마음이 여명 속에서 나를 향해  웃어줄지 모른다.     


나이테처럼 사람도 나이대로 결을 만든다면 늙는 일도 행복하다. 제 할 일을 끝낸 잎이 붉게 타다 바스러진 나무의 맨몸은 인간의 마지막과 닮았다. 다만, 나무는 새 꽃과 열매로 다시 풍성할 줄을 알아 당당하다. 소멸한 자리가 채워지는 자연의 이치가 엄연한데 나는 아직 비우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후회 없이 져주는 행복을 몰라 가을 몸살을 앓는다.       

    

생채기가 덧나고 낫기를 반복하면서 제법 면역력이 생긴 마음이 무던해졌으면 좋으련만, 바람이 스산하다는 핑계로 자꾸 도망 다닌다. 가만 보니 내 것이 아닌 마음이 있다. 집 나온 마음들이 하염없이 가을을 숨바꼭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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