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나는 헤맸고, 30대는 숨찼으며 40대는 끌려다니느라 바빴다. 돌아보면 참 열심이었구나 싶지만 덕택에 자주 병이 났다. 숨 고르듯 뛰는 속도가 느려진 오십이 되어서야 어쩌면 지금이 청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늙었다며 걸음을 멈춘 순간 죽음의 번호표를 받은 대기자마냥손놓고 생의 저 끝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낙이 없다’는 말은 더 생생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고, ‘살 만큼 살았다’는 허튼 말이 살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나이는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대로 두고 살아있는 순간을 느끼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 늦잠 잔 어제나 커피의 달고 쓴맛을 느끼는 오늘이 가장 찬란한 때이다.
노력을 배신하는 사회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촛불 시대를 지났지만 사람 사이의 계급은 여전하다. 기득권자가 가진 권리는 대를 잇고, 꼭대기까지 나 있는 사다리 옵션은 그들의 특권이다. 개인의 능력만으론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 보이지 않는 총성이 난무한 세상에서 일자리는 개인의 스펙을 넘어 사회의 타이밍, 부모의 재력과 지위, 친인척 찬스, 인맥 관리까지 동원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 모든 걸 망라할 때 능력이라 부르고 권력이라 칭한다. 탁월한 지능과 재능을 가진 소수를 뺀 나머지에겐 일자리 구걸이 남는다. 눈에 보여야 실체라고 믿는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보이지 않은 걸 사고파는 디지털 시대에 ‘노력하면 된다’는 예전 같은 채찍질이 당연할까. 웹 소설에서 유행하는 환생 모티프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을 접고 삶을 다시 세팅하고 싶은 욕망이다. 취업 대기 계단에서 혹시 모를 사다리를 꿈꾸는 청년이 지금을 즐기자며 생산성 없는 소비자로 사는 걸 탓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지금 청년에겐 산업 일꾼, 민주화 투사, 흙 수저 할 것 없이 기성세대가 기득권층일지 모른다.
경지에 오른 사람이 주는 감동은 역경을 극복한 성공보다 그의 스토리텔링에 있다. 연이은 불행에서 이뤄낸 불굴의 도전이 주제이지만 내가 기대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무엇이 살게 했을까. 그가 쥔 버팀목은 무엇일까. 경지에 이른 사람은 공통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들의 인생은 과거나 미래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나의 아저씨의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나 '눈이 부시게'의 “등가교환의 법칙이란 게 있어. 물건의 가치만큼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것처럼 뭔가를 갖고 싶으면 그 가치만큼의 무언가를 희생해야 된다 이거야.”라는 김혜자 님의 대사, '미생'에서의 체력을 길러야 하는 이유처럼 삶의 곳곳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현답이 많다.
낡은 질문에는 새로운 답이 없다.
결핍을 인정하지만 굴복하지 않고 결핍의 힘으로 살아내는 게 노년이다. 변화가 두려워지고 이 나이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아는 분야에만 올인할 때 우리는 쉽게 편협해진다. 알고 싶은 게 없는 무관심과 귀찮음은 조금씩 세상과 나를 단절시킨다. 잘못일까, 틀리지 않을까 불확실성을 안고 덤비던 젊음이 몇 번 돌부리에 넘어진 뒤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듯 도전은 나를 완성한다. 우리는 충분히 치열하게 살았다. 그때 얻은 지혜와 경험이 훈수로 둔갑해 상대를 단죄할 때 참 슬프다. 젊은이의 실수와 도전을 수습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생을 향한 우리의 질문도 조금은 신선해지리라 믿는다.
결핍을 인정하는 사람이 어른이다. 이런 사람은 부족한 틈을 타인으로 메꿀 줄 안다. 거목만 가득한 숲이 생애 주기를 넘기지 못하고 소멸하듯, 이끼와 풀, 살아 움직이는 벌레와 짐승이 있어야 비로소 숲이 울창해진다. 결핍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가벼움을 준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생각이 유연해지고 진실의 소리를 들을 여유가 생긴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구나 생각하고 솔직하게 질문할 때 세계는 확장되고, 창밖의 세상이 호기심 어려진다. 오늘 잘 살아내자. 그런 우리가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