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널브러진 술병들과 주사기, 자욱한 대마 연기로 가득 찬 방. 이렇게 영화 속에서만 보던 퇴폐적인 장면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간 중독이란 단어가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디어가 만들어낸 표상만 떠오를 뿐이었다. 과거에는 과도한 노동에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기 바쁘고, 주요한 즐길거리가 풍경보기, 독서, 티비 시청 정도뿐이었고, 알다시피 이런 취미들은 자극성과 접근성이 많이 떨어진다. 그렇기에 중독이라는 단어가 우리와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는 어떠할까? 우리는 수많은 자극적인 요소들에 둘러 쌓여 있다. 저자 애나 램킨은 정신과 의사이다. 그녀의 환자들 중에는 포르노에서부터 중독적인 영상들까지 다양한 요소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자극적인 미디어 콘텐츠와 우리의 미뢰에 맛의 향연을 선사하는 산해진미까지 현대의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거기에 가사와 신체의 이동 등 많은 신체적 활동을 발달한 기술에 외주화 하고, 노동 여건이 개선되며 현대인은 과거보다 월등히 많은 여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과연 현대인이 스마트폰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몇 분 일까? 앞서 말한 자극적인 요소들은 스마트폰의 터치 몇 번으로 접할 수 있다. 밤이고 낮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제공하는 앱과 맛있는 음식을 집 앞까지 배달해 주는 앱들 까지. 그리고 소비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는 쇼핑에도 중독된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의 저자이자 아산병원 노년내과의 정희원 교수는 소비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소비 진작이 우리에게 불필요한 소비의 과몰입을 유도하여 도파민 중독을 일으킨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쇼핑마저 약간의 스마트폰 조작으로 원하는 상품을 우리 집 앞까지 배송시킬 수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의 마법지팡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가 시간을 무수한 자극적 쾌락으로 채워주었다. 이렇게 자극적인 요소들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며, 현대인들은 이것들로 남는 시간의 공백을 채우며 탐닉적인 대상에 대한 중독 위험에 취약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더 행복해졌을까? 우울감, 불행을 토로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아지고, 하루가 멀다 하고 높아져가는 자살률은 현대인의 행복 정도가 과거보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현대 사회는 과거 어느 때 보다 항우울제의 처방률이 높아지고 있다. 유사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 지만 우리들은 어느 때보다 정신적 빈곤함을 느낀다. (물질적) 풍요 속의 (감정적) 빈곤이다.
도파민 충만의 시대. 쾌락보다 고통을, 행복보다 불행을 토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경과학적으로 뇌에서 쾌락과 고통을 처리하는 곳은 동일하다. 쾌락의 수치가 올라가면 이에 맞춰 고통의 수치도 올라간다는 것인데, 저자의 표현을 빌어 쉽게 설명하자면 양팔 저울 한쪽에 쾌락이 생성되면 반대쪽에 고통이 생성되며 균형을 맞추려 한다는 것이다. 유튜브 숏츠를 한 시간쯤 보다 보면 머리도 아프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자책감이 든 적이 있다. 아마 이러한 기제가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과도한 도파민 분비는 이후 고통을 수반한다. 이것이 우울감 등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도파민에 의한 자극의 역치는 그 지속, 반복성에 따라 높아져간다. 오마카세를 먹으면 마트 초밥이 맛없게 느껴지듯 우리는 더 높은 자극을 찾게 된다. 자극 과잉의 시대 우리는 무한히 높아져 가는 쾌락을 좇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심지어 높아져가는 쾌락의 허들을 넘는다 하더라도 고통이 수반된다. 즐겁고자 쾌락을 좇는 행위가 고통으로 귀결되는 이러한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날 순 없을까?
한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현대인은 잠깐의 시간적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트렌드 코리아 2024의 김난도 교수는 이런 상황을 분초사회라 명명했다. 유흥거리와 해야 할 일이 포화상태인 현대인은 분단위, 초단위로 시간 계획을 세우며 행동한다. 심지어 드라마를 볼 시간도 부족해 빠른 배속으로 돌려보거나 유튜브의 요약본을 찾아본다. 그 덕분에 우리의 하루에는 여백이 없다. 현대인은 사유의 시간이 없다. 하루 중 아무런 외부 자극 없이 자신만의 사유의 바다를 유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있기는 할까?
뉴턴은 사과나무 아래서 수많은 사유의 시간을 보냈기에 세상의 물리법칙을 발견했고, 라이트 형제는 높은 언덕에서 수십 번 떠오르고 지는 해를 보며 하늘을 날 생각을 했을 것이다. 명상, 공상, 망상 등 다양한 인간적 사유는 창발적 사고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러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개인적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유의 시간을 잃고 미디어가 만든 에코챔버에 갇혀 다양성을 상실한 채 규격화되고 있다. 다양성을 표방하는 PC주의조차 또 하나의 규격의 틀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결국 인간의 다양성의 진정한 실현은 이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다양성의 상실과 도파민에 절여진 뇌는 자신만의 삶의 주체성을 잃게 만든다. 남과의 비교를 통한 자기혐오가 자신의 삶에 주인의식을 잃었기에 나오는 대표적 증상이다.
나는 현대인의 자신의 행복을 찾고 인생의 주체성을 얻으려면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년 겨울 즈음 나는 육아에 매우 지쳐있었다. 그때 아내의 허락으로 아이를 맡기고 혼자 속초로 떠났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멀리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겨 산책을 한 적이 있다. 비록 차가운 바닷바람에 오랜 시간 걷지는 못했지만,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에 의존하지 않은 채 생각에 빠진 건 오랜만이었다. 딱히 생산적이거나 의미 있는 생각을 한건 아니다. 그저 초등학교 때 숙제였던 마인드 맵처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정처 없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고작 10분 남짓의 시간이었을까? 현대인은 낭비라 치부할지 모르는 그날 하루의 10분의 여백 덕에 나는 한껏 여유로웠다. 날마다 바쁘고 바빠야 하는 요즘 쉽게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그 여유가 내 삶을 돌아볼 기회를 주었고, 바쁜 일상에 잊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그 시간의 한가로움이 좋았다. 그날 이후 가급적 명상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바쁜 하루의 삶에 인위적인 공백이라도 주어 내 삶의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서이다.
나의 이러한 작은 경험처럼 많은 사람들의 여가가 스마트폰과 도파민으로 절여지는 시간이 아닌 한가로운 여백이 될 수 있길 바란다. 그렇게 강박적인 쾌락 추구의 시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온전히 누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