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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서평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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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파파 Oct 01. 2024

037 악의 유전학(임야비 저)

드라마 속 부모에게 버림받고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손에 길러지는 아이들은, 핍박과 함께 이런 대사를 많이 듣는다.

'넌 널 버린 부모를 빼다 박아 그렇게 못됐구나.'


우리는 사람의 외모, 성격, 행동을 판단할 때 유전자를 물려준 사람을 대입하여 바라본다. 즉 사람의 성정을 주로 유전적 요인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한 사람을 형성하는 것에 있어 후천적인 요인 역시 지대하다. 똑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일란성 쌍둥이도 살아온 환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성격과 이질적인 외모를 갖게 된 사례가 왕왕 있는 것을 보면 환경의 영향이 새삼 놀랍다.


​그렇다면 후전적으로 획득한 성향도 후대에 유전이 될까?


이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이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다. 이는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하며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이 후대에 전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린의 조상이 높이 있는 곳에 먹이를 먹기 위해 노력하였기에 현재 기린의 목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논리적인 이론이다. 하지만 DNA가 전달되는 방식이 밝혀지며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은 후대에 이어지지 않는다는 연구에 따라 이 이론은 학계에서 기각되었다.


​그러나 최근 후성유전학이 각광을 받으며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이론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질이 후대에 유전이 되는 사례가 발견이 된 것이다.


​* 후성 유전학 : DNA 염기서열이 바뀌지 않은 채 유전자의 기능변화가 후대에 유전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


이 때문에 사장되었던 라마르크의 주장은 다시금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는 최근 다시 떠오르는 획득형질에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의 집필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이후 작성된 소설의 줄거리에는 소설의 중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은 이점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설의 배경은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 시대이다. 테러, 파괴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동료도 과감히 버리는 '한 남자'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인다. 그런 그도 어머니가 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그가 수많은 죄목으로 유형을 가기 전,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찾아온다. 마지막일지 모를 아들과의 만남에 어머니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바로 자신의 유년 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고통에 관해서이다.


​시점은 어머니가 아직은 어린 소녀였던 수십 년 전으로 전환된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깊게 감명받은 리센코 후작은 황제에게 막대한 지원을 받아 인간 개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러시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한랭 내성을 가진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전국의 고아 500명을 모아 '홀로드니아'라는 마을을 건설하여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반복된 추위 훈련에도 한랭 내성을 지닌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다. 점점 황제와 약속한 기한이 다가오자 리센코 후작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자멸의 길에 빠진다. 그는 실험 초기에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으나, 반복된 실패로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술에 취해 아이들을 겁탈하고 폭행한다. 계속된 실험의 진행에도 진전이 없자 결국 프로젝트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리센코 후작은 악마화되어 '홀로드니아'의 모든 이를 죽이려 한다. 그의 폭정에서 간신히 탈출한 남녀 한 쌍은 먼 곳으로 도피하여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린다. 그 아이가 바로 '한 남자'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신학도의 길을 걷기를 바랐으나, 아들은 이를 거부한다. 아들의 잔학 무도함을 슬퍼한 어머니는 아들에게 끝내 한 가지 사실은 전달하지 못한다. 바로 '한 남자'의 발가락이 기형으로 태어난 것이 리센코 후작이 부상을 입어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붙어버린 발가락과 똑같다는 것을 말이다. 경찰들이 그를 잡으러 집으로 들이닥쳤고, 그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그는 강철같은 의지를 위해 이름을 개명했음을 밝힌다. 바로 '스탈린'으로.


​실제 역사적 인물인 스탈린의 탄생을 '홀로드니아'라는 가상의 실험 세계와 연결 짓는 작가의 상상력이 경탄스럽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눈길이 간 것은 다른 부분이다.


​놀라운 결론에 가렸지만 한 가지 모순이 느껴진다. 리센코 후작은 평생의 노력에도 획득형질의 발현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스탈린은 리센코의 후천적 발가락 기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작중 획득형질의 유전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질은 유전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실제 사례로 증명되었다. 다만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현재의 후성 유전학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목적성의 유무이다. 라마르크는 자주 사용하는 형질이 후천적으로 유전된다고 보았다. 잦은 사용이라는 단서에는 특정 형질 유전의 조작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인간의 개입 가능성을 지닌 이론은 주관적 목적의 주입 우려가 있다.


​과학 이론에 특정한 목적이 가미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 이에 대표적인 것이 다윈의 진화론에 골턴이 서구의 편견을 가미하여 탄생시킨 우생학이다. 우생학은 제국주의 시대 서구의 수많은 지배계층에 수용되어 막대한 생명을 빼앗았다.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대표적인 예이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다르게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은 생명체의 진화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작중 스탈린은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떠나기 전 두 권의 책 중 하나만 품는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아닌 라마르크의 <동물철학>이다. 결국 스탈린이 자행한 끔찍한 역사적 사실들을 상기하면, 작가는 후성 유전학에 어떠한 의미도 목적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현실에서 '홀로드니아'를 마주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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