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화폐는 지폐 형태의 법정화폐이다. 지폐의 기원은 금 보관 영수증이다. 수천 년 동안 가치저장 수단으로 사용된 금은 그 무게와 부피 때문에 보관과 거래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세공업자에게 금을 맡겨 영수증을 받았고, 거래 대금을 지급할 때 금을 찾아와 지급하기보다 금 보관 영수증을 전해주며 화폐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무도 지폐를 가지고 국가나 은행에 가서 금으로 바꿔달라 하지 않는다. 또한 국가와 은행도 지폐를 금으로 태환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갓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지폐가 그 액면에 인쇄된 숫자만큼의 가치를 가진다고 믿고 거래와 저축에 활용한다. 이러한 믿음을 심어준 것은 국가권력의 보증이다. 1971년 닉슨 쇼크로 금 태환이 중단된 이래로 정착한 지금의 법화 시스템의 나이는 겨우 수 십 살 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도 안정적이라 생각했던 지금의 법화 시스템에 큰 문제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금 태환이라는 제약이 사라진 법화는 정부 당국과 정치가들의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발권량을 늘려왔다.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돈을 찍고, 표를 얻기 위해 환심을 사려고 돈을 뿌린다.
세계경제는 근래에 벌어진 수많은 위기를 잘 극복하고 순항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브레이크 없는 무제한적 발권력은 국가 부채를 급격히 늘려왔고, 안정된 세계 경제의 이면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막대한 부채가 숨어있다.
이 밖에 경제 메커니즘의 문제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의 탓이 법화 시스템이 있다며 저자는 공격적인 주장을 이어간다. 법화의 자의적인 발행이 시장 시스템을 망가트리며 정부와 정치권의 입맛에 맞도록 과학계가 어용 학회로 변질되었고, 그 때문에 기후 위기론이 부풀려지고, 가공식품 등 정크푸드의 공급이 늘었다는 것이다.
읽는 도중 눈살 찌푸려진 대표적인 것이 기후 위기론이 거짓이고 부풀려졌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실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아주 적은 비율만 증가했을 뿐, 온도는 산업화 시대와 비교해 인간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높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옥불이 도래할 듯 주장하는 극단적 기후위기론자들을 비판하고, 어용 과학계가 비관론을 부추긴다며 힐난한다.
하지만 실제 기후 위기는 그런 식으로 오지 않는다. 실제 산업화 시대와 비교해 지구의 평균기온은 1.5도 가까이 올랐다. 하찮은 수치라 치부할 수 있지만, 라면 끓이는 물을 생각해 보라. 1인분을 위한 물의 양 500cc는 금방 끓지만, 4~5인분을 위한 2리터의 물은 끓는데 훨씬 더 양의 에너지 공급이 필요하다. 지구라는 행성을 1.5도 데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열에너지가 추가로 공급되었나 생각하면 1.5도라는 수치가 작다고 비웃을 수 없다. 이러한 온도 상승은 기후를 변화시키고 있다. 기존에 인간이 살기 적합했던 지역은 잦은 홍수와 폭염 등으로 거주에 부적합하게 변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도시화율이 높은 사회는 사람들의 거주 지역 이전이 어렵다. 여러 동식물이 생태계 변화에 따라 서식지가 뒤섞이며 다양한 전염병 창궐을 초래할 위험도 있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바뀌어 버린 기온과 습도는 산불이 유행하게 만든다. 거기에 작물 품종과 수확량에 영향을 준다. 근래의 금배추 사태 등은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다양한 변화가 만드는 여러 위협이 기후 위기의 실체이다. 지옥불로 뛰어들 듯한 극단적 온도 상승만이 기후 위기의 본질이 아니다.
이 밖에도 만악의 근원을 법화에게 돌리는 저자의 논리적 비약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지만 화폐에 대한 본질적 고민과 법화에 내재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부분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저자는 그가 지적한 많은 문제에 대한 최적의 해법으로 비트코인의 정식 화폐화를 주장한다.
고전역학의 메커니즘 속에 사는 우리는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물가의 상승 시대에 살아온 우리는 물가 하락을 엄청난 재앙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술발전과 혁신에 따라 생산력이 늘어나면, 인위적으로 화폐를 늘리지 않는 한 물가가 낮아지는 (화폐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의 혈액과 같은 화폐가 충분한 유동성을 갖추기 위해 사회의 생산성 향상에 맞춰 화폐의 총량을 늘리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거기에 정치권과 기득권의 시뇨리지를 독식하려는 탐욕이 더해져, 우리는 지속적이고 과도한 인플레이션 현상에 익숙해 있을 뿐이다. 프리드먼은 말했다.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화폐적인 현상이라고.
저자는 한스 헤르만 호페의 말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인간의 문명화 과정은 곧 시간선호가 낮아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시간선호'란 쉽게 말하면 미래 대비 현재에 대한 선호의 정도이다. 즉 시간선호가 낮다는 말은 미래에 더 높은 가치를 두어 저축 등 미래지향적 행동을 추구한다.
종교, 사회, 문화적 규범에 근간한 인간의 사회적 협동은 낮은 시간선호, 즉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서 발로 한다. 그러나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시간선호의 극단적 상승과 미래 가치에 대한 지닌 친 할인을 초래하고, 이는 장기적 편익의 가치를 희석시켜 인간들의 근시안적 행위를 촉발한다. 욜로(YOLO)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현재 선호 현상의 책임에서 법화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정말 비트코인이 답일까?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상을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 나는 비트코인의 기술적 완결성과 탈 중앙화라는 철학적 건전성은 동의한다. 하지만 화폐로 기능하기 위한 중요한 특성은 충족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비트코인은 그 발행 총량이 정해져 있다. 최대 2천만 개의 비트코인이 채굴 가능하고 거래를 위해서는 소수점 단위로 분할 결제가 가능하지만, 최대 소수점 8자리까지만 쪼개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 세상은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생산성이 향상되고 새로운 재화가 탄생하고 있다. 총생산성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원활한 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향상에 맞춰 화폐의 총량도 증가해야 한다. 이는 원활한 거래와 더불어 활발한 혁신을 자극하기 위함도 있다.
예를 들어 통화량이 고정된 가상의 A 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세계에는 빵만 생산된다. 빵만 거래되기에 빵의 생산량과 가격을 합산하면 사회의 총유동성과 같다. 기술 혁신으로 더 맛있게 빵을 먹을 수 있도록 딸기잼이 개발되었다. 빵을 포함해 딸기잼 또한 거래되어야 하기에 빵 가격은 자연히 내려간다. 거래되는 재화가 늘어났기에 상대적으로 화폐의 희소성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또다시 혁신을 통해 사과잼이 개발되었다. 같은 이유로 빵과 딸기잼의 가격은 또다시 내려간다. 이렇게 포도잼, 복숭아잼 다양한 잼이 개발되었지만 한정된 화폐의 양에 가격은 계속 내려간다. 제품 가격은 계속해서 내려가고 거래 역시 줄어든다. 더 이상 다양한 잼을 개발할 경제적 유인이 사라진다. 이렇게 사회 혁신은 소멸한다.
비트코인의 한계는 바로 이러한 총량의 고정에 있다. 물론 기술적 보완을 통해 비트코인을 소수점 이하 무한히 쪼갤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금의 한정된 수량에 은이 등장하였듯 이더리움을 앞세운 새로운 알트 코인이 이인자의 자리를 차지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한정된 총량이라는 장점을 상실케 한다.
두 번째로는 화폐의 기능을 위한 암묵적 합의의 어려움 때문이다. 화폐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사인 간의 거래 과정에서 교환의 편리함을 위해 인위적으로 탄생한 것이며, 그 인위성에는 화폐의 기능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기본이 되어있다. 대표적 화폐인 금과 달러(법화)는 각각 다른 기준으로 신뢰가 형성되었다. 금은 영롱한 금빛의 심미성, 세공의 용이성, 타 금속에 비해 극단적으로 낮은 변질성, 한정된 채굴량에 따른 희소성 등의 이유로 수천 년간 가치저장 및 교환의 매개로 통용되었다. 그 긴 시간은 우리의 DNA에 노랗고 반짝이는 물체에 대한 본능적 끌림을 각인시켰을지 모른다. 반면 달러를 위시한 법화는 그 가치가 국가라는 권위적인 존재에 의해 보증되기에 신뢰받는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높은 기술성과 건전한 철학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지 십수 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와 그 가치를 보장하는 주체가 없기에 사회적 합의의 근간인 신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비트코인의 화폐 사용이 어렵다고 보는 이유는 경제 위기 때 사용할 수 있는 통화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 속 많은 경기 침체에 중앙은행은 금리의 인하와 유동성 공급으로 그 위기를 파훼했다. 하지만 비트코인이 기반인 화폐 체계에서는 통화량의 증감에 재량권이 없기에 위기를 극복한 수단이 전무하다. 위기 때 극약처방이 불가능한 경제는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거나, 너무 긴 침체기를 겪어야 할 우려도 있다.
지금의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의 인기는 탈중앙이라는 레토릭보다 우상향하는 차트, 즉 자산의 증식을 위한 목적이 더 강해 보인다. 이미 자산의 한 분야로 사회적 인정은 일정 수준에 이르렀기에 가지 저장의 수단으로 수요는 지속될 듯하나 위에 서술한 이유로 공식적으로 거래에 직접 이용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소 과격하고 빈약한 논리에도 법화의 내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트코인이라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좋았다. 21세기 들어 세계는 안정적인 저물가 기조에 두 눈과 귀가 가려졌었다. 그래서 각종 위기를 무모할 정도로 과도한 돈 풀기로 타개하였다. 그 결과가 지금 막대하게 쌓여 있는 각국의 부채이다. 부도, 도산은 기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역시 과도한 부채가 원인이 되어 무너질 수 있다. 부채의 무서움은 그 파급효과가 무너진 채무 주체 한 곳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한 주체, 혹은 국가의 도산은 연쇄적인 파멸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막대한 부채에 숨겨진 진정한 위협이 바로 이런 것이다. 세계의 경제적 파국을 막고 잔존한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발권에 제약이 없는 법화의 특성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